7장 조선의 능묘제도
능 | 묘 | 영분 | 원 |
왕, 왕비 | 왕릉을 제외한 무덤 |
일반무덤 | 왕세자비 조선 ,후기 왕의- 왕세자 사친 무덤 , |
국장 | 예장 |
1. 고대~고려의 왕릉
1) 능
(1)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짐
(2) 시신 안치 방식 : 신전장만 우리나라에서 확인됨
- 굴신장 : 다리를 구부림
- 신전장 : 다리를 폄
(3) 태양숭배 의식
- 머리 : 동쪽(태양), 얼굴 : 하늘을 향함
2) 고대사회의 무덤 : 대부분 지배층의 무덤
(1) 청동기 시대 : 지석묘(고인돌-탁자 형)
-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
- 석실에서 돌칼과 토기 등 유물 출토
- 죽은 자의 권위가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믿음
v 석실 :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 개석 : 뚜껑돌
(2) 옹관묘
- 한반도 중남부 지방
- 흙으로 구운 대옹 2개의 아가리를 맞추어 그 속에 시체를 넣고
옆으로 눕혀 묻는 방식
- 여러 개의 옹관 함께 발굴 : 순장
1. 고대의 무덤에 대해 맞게 설명한 것은? 4
① 우리나라에서는 굴신장만 확인되었다. X 신전장
② 지석묘(고인돌)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이다. X 청동기
③ 옹관묘는 큰 항아리 1개로 조성하는 무덤이다. X 2개
④ 지석묘 석실에서 돌칼과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해설】 옹관묘는 흙으로 구은 대옹 2개의 아가리를 맞추어 그 속
에 시체를 넣고 옆으로 묻는 방식
3) 삼국시대의 무덤
v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무덤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문화적 차이가 있음을 의미
(1) 부여, 고구려, 백제 초 : 적석총(피라미드 형)
- 고구려, 백제 왕릉 중 확인 가능한 왕릉의 주인은 소수
(4) 신라 : 적석목곽분
- 56명의 임금 가운데 37기 왕릉 확인 및 추정
(5) 가야 : 목곽묘와 수혈식 석실분
- 많은 부장품 함께 발굴
2.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유행했던 고분 형태는? 2
① 고인돌 ② 적석총 ③ 적석목곽분 ④ 수혈식석실분
【해설】 시대별 고분형태
청동기시대-고인돌 / 부여, 고구려, 백제-적석총
신라-적석목곽분 / 가야-목곽묘와 수혈식 석실분
4) 통일신라시대
- 당나라 능묘제도 영향
- 석실 위 호석 설치, 12지신 상 조각, 난간석 설치
- 왕릉 주위에 석물을 장식
- 태종무열왕릉부터 신도비 건립
- 괘릉이라는 능호를 쓴 원성왕릉에서 신라의 능제 완비
5) 고려 : 통일신라 왕릉 계승, 발전
- 현릉을 모범 삼아 조성된 고려 왕릉은 몽고 침략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며 제후국에 해당하는 규모로 축소
- 노국공주의 정릉은 공민왕이 공사를 감독하며 원나라에서 우수
한 공장을 데려와 이전 왕릉보다 화려하고 뛰어난 왕릉 조성
- 원, 명교체기 명나라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왕릉에 무인석 설치
- 공민왕과 정릉을 연결하여 고려에서 처음으로 쌍릉제도가 만들어짐
3. 고려 왕릉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2
① 태조의 현릉(顯陵)은 통일신라 왕릉을 계승하였다.
② 원 간섭기 이후에는 황제국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X 제후국
③ 정릉(正陵)은 노국대장공주의 능으로 만들어졌다.
④ 공민왕의 현릉(玄陵)은 정릉과 연결하여 만들었다.
2. 조선 왕릉제도의 정비과정
(1) 고려 공민왕릉을 모범으로 삼아 조성
(2) 신덕왕후의 정릉 : 조선의 최초의 왕릉
(3) 합장왕릉 : [정안왕후, 정종의 후릉]-조선최초, [원경왕후, 태종의 헌릉]
(4) 조선왕실의 석실 구조는 세종 때 큰 변화를 맞음
- [주자가례 : 주자가 유가의 예법의장에 관하여 상술한 책]에 따라
왕과 왕비를 합장할 경우 1개의 봉분만 조성
- 석마(石馬 :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를 문무석
인 뒤에 배설하여 왕릉의 석물 상설제도 완비
(5) 조선 왕릉은 대개 5개월의 기간 동안 조성
4. 조선시대 왕릉 조성의 모범으로 삼았던 능은? 3
① 무열왕릉 ② 무령왕릉 ③ 공민왕릉 ④ 원성왕릉
3. 현궁(⽞宮)의 변화와 봉분 시설
w 현궁 : 임금의 관(棺)을 묻던 광중(壙中).
1) 조선 초기 왕릉의 현궁
(1) 석실로 만들었고, 그 위에 봉분을 높이 쌓기 위해 병풍석을 설치
(2) 병풍석 가장자리에 상석(치맛돌)을 2중으로 깔아 봉분이 높아 보
이도록 하면서 빗물이 지하 석실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
(3) 치맛돌이 끝나는 지점에는 12면의 난간석을 시설하여 권위적인
모습으로 장엄
5. 조선 왕릉의 형태에 대해 잘못 설명한 것은? 1
① 현궁 조성 방식은 병풍석 구조와 관련이 없다. X
② 조선 초기의 왕릉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였다.
③ 병풍석 가장자리에는 상석(치맛돌)을 깔았다.
④ 상석이 끝나는 지점에 난간석을 시설하였다.
【해설】 조선 초기 왕릉의 현궁은 석실로 만들었고, 그 위에 봉분을
높이 쌓기 위해 병풍석을 설치함
2) 세조 광릉
(1) 석실로 조성된 무덤공간을 회격으로 만들면서 봉분 형태 큰 변화
(2) 회격이 굳을 시간이 필요하여 현궁 위에 가해지는 무게를 줄이려
고 병풍석을 제거하고 봉분이 높이를 낮춤
3) 재궁을 안치하는 지하공간과 지상에 드러나는 봉분의 형태에 따른 구분
제1기 | -석실로 된 현궁 위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 -문종의 현릉까지 |
제2기 | -회격으로 현궁을 조성하면서 봉분 무게를 줄이려고 병 풍석을 제거하고 난간석만 설치 -세조 광릉~정희왕후 광릉 |
제3기 | -현궁을 회격으로 만들고 병풍석과 난간석이 함께 설치 -성종 선릉부터 병풍석을 다시 설치하여 효종 영릉까지 병풍석과 난간석 설치 |
제4기 | -효종 영릉을 여주로 천장할 때 다시 병풍석을 제거하 고 난간석만 설치 -효종 영릉 이후 왕릉에서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설치 |
4. 능상(陵上) 상설 석물
명칭 | 내용 |
곡장 | -전돌을 쌓아 이룬 담장 상단에 기와를 얹어서 마감한 것 -왕릉의 봉분 보호 -곡장과 봉분 사이에 망주석과 외호석수가 배치 |
망주석 | -멀리서 무덤 위치 쉽게 확인 -조선 왕릉은 공민왕릉의 망주석을 모범으로 삼음 -16세기 초반부터 사대부 분묘에도 설치 시작 |
외호석수 | -우리나라 왕릉에 처음 등장한 외호석수는 통일신라 성덕왕릉에 배설된 석사자 -공민왕릉과 조선 왕릉은 통일신라 이래 전통적 석 수 배설 위치를 계승하여 봉분과 곡장 사이에 석양 과 석호 배치 -조선 왕릉에서는 소헌왕후의 영릉에서부터 석마 설 치 시작 |
석상(상계) | -제의를 올릴 때 제물을 진설하기 위한 것 -조선 초 왕릉에서 불교식 제의는 사라졌으나 석상 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인식되어 계속 배설 |
장명등 (중계) |
-언제나 불빛을 밝히는 등불이라는 뜻 -왕의 교화가 퍼져나가기를 바란 것 -세종대에 장명등은 계속 설치하되 사용하지는 않기로 함 |
배석, 소전대석 |
-배석은 절하는 자리, 소전대석은 지전을 태우려고 마련한 석물 -세종이 왕릉제도를 정비하고 유교 의례를 강화함에 따라 더 이상 배설하지 않음 |
문석인, 무석인 |
-조선 왕릉은 공민왕릉과 같이 문석인과 무석인 함 께 배설 -전기에는 봉분마다 1쌍씩 세움 -후기에는 합장했을 경우 1쌍씩만 세움 -문석인은 국상 때 문무백관의 복식을 형상화 -무석인은 복발형 투구를 쓰고 목가리개가 가려져 있는 형상 |
6. 조선 왕릉의 석물 가운데 무덤 위치를 멀리서 쉽게 확인할 수 있
도록 세운 것은? 2
① 장명등 ② 망주석 ③ 배석 ④ 곡장
【해설】 장명등-등불 / 배석-절하는 자리 /
곡장-전돌을 쌓아 이룬 담장 상단에 기와를 얹어서 마감한 것
5. 정자각의 부속 시설
1) 정자각
(1) 왕릉 바로 앞에 지은 정(丁)자 형태의 제전
- 조선초기 : 유교와 불교의 제향이 공존하여 크지 않은 규모
- 태종, 세종 대 : 불교 사찰 정리 후 규모 확대
- 세종 : 유교식 제의 강화
(2) 제례가 있을 때 이곳에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근처
에 있는 재실에서 음식을 장만
7. 조선 왕릉 바로 앞에 지은 제전(祭殿)은? 1
① 정자각 ② 홍살문 ③ 수복방 ④ 향어로
【해설】 홍살문-붉은색 문 / 수복방-수복들이 사용하는 공간
향어로-홍살문 사이로 난 어로(길)
2) 부속 시설
(1) 신도 : 정자각과 봉분 연결하는 길
(2) 배위청 : 제향 시 직역을 맡은 관원 대기 장소
(3) 비각 : 정자각 동쪽에 비석을 세우고 보호
(4) 신도비 : 왕의 업적을 정리한 긴 서문과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
- 거북이 모양의 받침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윗부분에 용 모양을
화려하게 조각
(5) 예감 : 치석(治石 : 돌을 반드럽게 다듬음)한 판석으로 사각형의 구
덩이를 만들고 제향에 쓴 축문과 폐백을 묻는 시설
(6) 산식석장 : 3년 동안 왕릉에서 제전을 지내면서 산신에게 제사지
내기 위한 것
(7) 전찬배설청 : 재물 진설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 별도로 마련한 건물
(8) 장기고, 제기고 : 제기를 보관하는 곳
(9) 수복방 : 봉분과 정자각을 지키는 수복들이 사용하는 공간
(10) 홍살문 : 붉은 칠을 한 2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쭉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의미를 가진 문으로
왕릉 출입을 위한 정문에 해당
(11) 향어로 : 홍살문 사이의 어로
(12) 망릉위 : 4각형의 단으로 능에 도착하여 능이 바라보이는 자리
에서 인사를 하는 곳
8. 조선 왕릉의 부속시설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3
① 능표석 – 누구의 능인지 확인할 수 있는 표석
② 전찬배설청 – 제물 진설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 마련한 건물
③ 망릉위 – 왕릉을 출입하기 위한 정문에 해당하는 시설-홍살문
④ 수복방 – 봉분과 정자각을 지키는 수복들이 사용하는 공간
6. 재실(齋室)과 능관
1) 재실
(1) 헌관이 제향을 올리기 앞서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곳
(2) 재각, 재소, 재궁으로도 불림
(3) 능관이 수직하는 관청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울 수 없음
(4) 각 능마다 형태와 규모는 다르지만 용도는 모두 동일
(5) 조선 후기가 되면서 재실 규모 확대되고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지
면서 재실도 그에 맞게 격식을 갖추게 됨
(6) 재실 내부에는 어재실, 안향청, 전사청, 제기고 등이 갖추어짐
9. 조선 왕릉 입구의 재실(齋室) 내부에 갖추어진 시설이 아닌 것은? 4
① 어재실 ② 안향청 ③ 제기고 ④ 홍살문
【해설】 홍살문-붉은색 문으로 부속시설에 해당
2) 능관
(1) 능지기의 직임을 맡은 임시적 관원에서 시작하여 세조의 관제 정
비에 따라 참봉이 되었다.
- 숙종 대에 능참봉 가운데 1인을 별검, 직장, 봉사로 임명하기 시작
(2) 왕릉이 조성될 때마다 추가로 임명되었고 국상기간이 끝날 때까
지 삭망으로 제사를 올리는 임무가 주어짐
-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파격적인 승진의 기회가 주어짐
7. 사대부 묘제
1) 신분에 따른 차별
(1) 고려 :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의 면적과 봉토의 높이를 신분에 따
라 차별 적용
(2) 조선 : 신분질서에 따라 독자적인 묘지제도
- 면적은 규제했으나 봉토의 높이에 대하여 고려와 같은 별도의
규제를 두지는 않음
2) 예장과 시호의 하사
(1) 경국대전 제정 이전부터 종1품의 의정부 참찬 이상을 지낸 인물
과 개국공신을 대상으로 예장 시행
(2) 예장과 시호 하사는 사헌부의 엄격한 간쟁을 거쳐야 했음
3) 장례비용 지급
(1) 4품 이상과 5품 이하로 구분하여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에게는 장례비용 지급
4) 신도비
(1) 종 2품 이상의 묘에만 건립
(2) 임진왜란 이후 개인 문집과 비문이 중요한 자료로 부각
(3) 가문의식 성장과 동족마을 증가로 선산을 경영하려는 가문이 늘고,
선조의 신도비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여 묘비 건립 증가
10.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에 대해 맞지 않은 것은? 3
① 신분에 따라 묘지 면적을 규제하였다.
② 봉토의 높이에 대하여 별도로 구제하지는 않았다.
③ 지위와 관계없이 누구의 묘에나 신도비를 세웠다.
④ 예장과 시호를 하사할 때는 사헌부의 간쟁을 거쳤다.
【해설】 종 2품 이상의 묘에만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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