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성곽
1. 성곽의 기원과 역사적 변천
1) 성곽의 개념과 기원
(1) 외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인위적 구조물
- 어원 : 이중의 장애물로 둘러쳐진 성벽 시설
- 성 : 안쪽, 곽 : 성 바깥을 다시 둘러싼 벽
(2) 기원 : 청동기 시대
- 계급이 분화되고 지배가 등장 뒤 전쟁 시작
- 목책(성) : 마을 전체를 나무 울타리로 둘러 침,
환호(곽) : 그 바깥에 구덩이를 파서 만든 장애물
(3) 국가가 성립할 무렵 성곽도 발전
- 고조선도 성곽을 갖추고 있었음
1. 성곽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2
①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조 구조물이다. X 인위적
② 방어를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쌓은 구조물이다.
③ 구석기시대부터 만들어진 방어시설이다. X 청동기
④ 마을 방어에 쓰였으며, 국가 성립과는 관계없다.
【해설】 청동기 시대에 계급이 분화되고 지배가 등장 뒤 전쟁 시작되
면서 성곽을 쌓기 시작하였고 국가가 성립할 무렵 성곽도 발전하였
다. (國 나라 국) 자는 흙을 다져서 성벽을 쌓은 네모꼴 성곽 속에 궁
궐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시설과 민가가 자리 잡은 모습 형상화 한 것
2) 성곽의 전성 시, 삼국시대
(1) 현재 남아있는 산성의 대부분이 삼국시대에 쌓은 것
-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축성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 동원 가능
(2) 지방관이나 군 지휘관이 평소 산성 안에 상주하며 업무를 봄
(3) 청야수성 전술 : 외적이 침입하면 식량을 갖고 산성으로 피하여 방어
(4) 삼국통일 이후
- 중요한 행정, 군사 중심지에는 성을 쌓음
- 후방의 일부 성곽에 대한 관심은 멀어짐
(5) 신라말기
- 중앙정부 통제력 약화와 호적의 등장으로 성곽의 중요성 다시 부각
2.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성곽에 대해 맞지 않은 설명은? 4
① 삼국은 성을 쌓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② 각국은 기존의 영토를 지키려고 성을 쌓았다.
③ 산성에는 행정, 군사 책임자가 상주하였다.
④ 삼국통일 이후에는 성곽 축조를 중단하였다. X
【해설】 삼국통일 이후 중요한 행정, 군사 중심지에는 성을 쌓았고
계속 이용됨. 그러나 후방의 일부 성곽에 대한 관심은 멀어짐
8. 다음 중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은? 3
① 고창읍성 ② 면천읍성 ③ 명활산성 ④ 남포읍성
【해설】 조선초기 : 해미읍성, 남포읍성, 고창읍성
3) 고려, 조선시대의 성곽
(1) 고려시대
- 큰 고을 : 읍성과 함께 산성을 쌓아 비상시에 대비
- 행정의 중심인 읍성은 구릉이나 산지에 위치
(2) 고려시대 대표적인 성곽
- 천리장성 : 여진족 침임 방어, 압록강 어구 ~ 원산만
- 귀주성 : 박서가 지휘
- 충주산성 : 김윤후가 노비문서를 불태우자 노비들까지 합심하
여 70여 일을 버티며 적군을 물리침
- 처인성 : 김윤후가 차여하여 적장 살리타를 전사 시킴
(3) 고려 말~조선 초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로 산성보다 읍성에 관심
(4) 조선초기에는 국방체계를 가다듬고 바다에 가까운 곳으로 쌓음
- 해미읍성, 남포읍성, 고창읍성
- 산성전투 : 임진왜란 시 어렵게 승리한 곳
(5) 병자호란은 양상이 달라. 청 태종은 한양으로 진격했고 남한산성
에 피난한 인조는 항복함
- 도성 방어가 강조되어 북한산성, 남한산성 보수와 강화도 방화
시설을 갖춤
(6) 시간이 흘러 성곽에 대한 관심 낮아짐
- 많은 산성들이 버려지고, 지방 읍성들도 방어시설로 관리되지 못함
3. 고려~조선시대 성곽과 관련된 내용을 잘못 연결한 것은? 2
① 처인성 – 몽골 침입 때 김윤후가 활약하였다.
② 천리장성 – 조선과 명의 문화적 국경선 역할을 하였다. X
③ 해미읍성 – 조선 초기에 새로 쌓은 읍성이다.
④ 남한산성 –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하였다.
【해설】 천리장성은 고려시대에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리고
일종의 문화적 국경선의 차원에서 압록강 어구에서 원산만까지 축조
4) 공사 실명제의 전통
(1) 공사 책임자와 작업집단별 공사구간 새기는 방식
- 삼국시대~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전통
- 신라 : 명활산성작성비, 남산신성비
(2) 삼국통일 이후 축성을 맡은 지역명을 성벽에 새겨 넣는 방식으로 변경
(3) 8세기, 테뫼식 산성인 신대리성 성벽
- 일정 구군마다 어떤 고을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쌓았는지 새겨져 있음
(4) 조선 초기 해미읍성, 고창읍성 성돌에는 지명이 여럿 남아 있음
(6) 세종 때 한양 도성을 고쳤을 때 전국에서 동원된 인부들이 남긴
지명을 성벽에서 찾을 수 있음
(7) 조선 후기에 공사 책임자의 이름과 직책을 간단히 새기는 방식으로 변경
2. 성곽의 유형과 구성 요소
1) 성곽의 종류와 명칭
분류 | 명칭 | 내용 |
행정, 군사상의 지위와 기능 |
도성 |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있는 최상급 행 정구역과 그 행정구역을 둘러싼 성곽 |
읍성 | 지방의 큰 고을을 둘러싼 성곽 | |
지넝 | 서남해안이나 압록강, 두만강 국경지 대에 소규모 군대 주둔 |
|
창성 |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한 양을 옮길 때 중간에 보관하는 지역 에 둔 창고 보호 |
|
입지와 기능 |
산 성 | 높은 산위에 쌓은 성곽 |
테뫼식 | 산봉우리에 테를 두르듯 성벽을 쌓은 성곽 | |
포곡식 | 계곡과 골짜기를 끼고 있는 성곽 | |
평지성 | 평지에 쌓은 성곽 | |
평산성 | 배후에 산을 끼고 평지를 쌓은 성곽 | |
장성 | 국경 지대에서 적의 침입을 막거나 영 토의 경계를 표시 |
|
관문성 | 중요한 교통로의 길목을 지키며 전시 에 적군의 진격로 차단 |
|
성벽의 재료 |
토성(흙) | 토성이 먼저 출현-> 지배체제 정비-> 석성을 쌓음 |
석성(돌) | ||
토석혼축성 | 흙과+돌 (경주 월성) | |
전성(벽돌) | 우리나라에서는 성벽을 돌로 쌓는 관 행이 강하게 유지되어 화성을 지을 때 도 벽돌은 일부 시설에만 사용됨 |
4. 왕조국가에서 최상급 행정구역, 또는 이를 둘러싼 성곽을 가리키
는 말은? 1
① 도성 ② 읍성 ③ 진성 ④ 창성
5. 중요한 교통로의 길목을 지키면서 전시에 적군의 진격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쌓은 것은? 3
① 장성 ② 평지성 ③ 관문성 ④ 산성
2) 성과의 구성 요소
(1) 성벽 : 성곽의 기본 요소
- 쌓는 방법에 따라 내탁법, 협축법, 삭토법이 있다.
내탁법 | -경사면의 바깥을 깎아 성벽을 쌓고 안쪽은 지표면과 같거나 거의 차이가 없게 하는 방식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성곽 |
협축법 | -평지에서 성벽의 안과 밖 높이를 거의 같게 쌓아 올림 |
삭토법 | -비탈을 깎아 급경사를 만들어 성벽을 쌓지 않아도 같 은 효과 발휘 |
(2) 성곽의 구성 요소
성가퀴 | 성벽 위에 요철 모양의 성가퀴(여장, 성첩)를 설치하여 방어하는 병사를 보호 |
치 | 가까이 다가온 적군을 공격하려고 성벽 중간에 튀어 나오게 만든 시설 |
해자 | 적군이 성벽 쪽으로 쉽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바깥에 웅덩이를 파서 물을 채움 |
수문 수구 |
수문-골짜기를 가로질러 성벽을 쌓은 경우 계곡 물이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함 수구-성 안의 물이 밖으로 빠져 나가게 함 |
성문 | -적군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성문은 안에서 밖으로 열 수 있도록 만듦 -옹성 : 성문 앞쪽을 성벽으로 한 번 더 둘러쳐 설치 한양 도성의 동대문, 수원화성과 고창읍성 |
암문 | -몰래 출입이 가능한 문 -삼국시대 산성에는 현문식 성문도 많이 발견 |
장대 | -성 안에서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때 밖을 바라볼 수 있는 누각 -화성의 서장대,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망루 : 적의 동향을 잘 살필 수 있는 곳에 설치 |
우물, 집수시설 |
-전쟁 물자를 위해 평지성에는 우물, 산성에는 집수 시설을 갖추었다. |
6. 적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곽 바깥에 웅덩이를 파서 물을
채운 것은? 4
① 성가퀴 ② 여장 ③ 성첩 ④ 해자
7. 성문 앞쪽을 성벽으로 한 번 더 둘러친 것은? 2
① 암문 ② 옹성 ③ 장대 ④ 망루
3. 실용성의 소멸, 설화와 민속
1) 실용성 약화와 관념의 잔존
v 화성은 성곽이 실용성을 잃어가는 마지막 단계에 축조
(1) 화성(정조)-축조 시 새로운 요소의 도입
- 한국 성곽문화의 최고수준
- 임금 지급
- 거중기 사용(정약용)
- 벽돌 사용(일부 시설물)
- 공심돈 설치 : 총포를 쏠 수 있는 곳
(2) 성곽의 실용성 약화 : 서양에서는 15세기를 전후로 총포의 발달
(3) 관념의 잔존(세계사의 추세와 거리가 먼 관념)
- 지배층과 지식인은 여전히 성곽이 있어야 든든하다는 오래된
관념 유지
- 방어 시설로 실용적이지 않으나 성곽을 새로 쌓거나 수리
: 부산 금정산성, 군위 화산산성, 옥산성
- 금성산성 : 동학농민이 관군에 맞서 농성하다가 참패
- 검산성 : 동학군이 봉기하자 의병을 일으켜서 성을 쌓음
9. 1894년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농성했던 성은? 1
① 금성산성 ② 옥산성 ③ 금정산성 ④ 화산산성
【해설】 옥산성 : 개항 이후 외래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에 축조
1873년 거제부사가 백성을 부려서 쌓음
2) 성곽 관련 설화와 민속
(1) 설화 : 오누이 성 쌓기
(2) 민속놀이
- 성 쌓는 노동에 기억이 변형되어 복을 비는 민속놀이로 자리 잡음
- 답성 놀이 : 고창읍성 성 밟기
4. 강화도의 돈대와 남해안 왜성
강화도-돈대 | 남해안-왜성 |
조선 후기(숙종) 국방을 위해 축조 | 임진왜란 때 일본이 남긴 흔적 |
진 5개, 보 7개, 돈대 54개 | 30여 곳, 전라도 순천왜성(이순신) |
1) 강화도의 돈대
(1) 중국 요동의 방어시설을 우리 지형에 맞게 적용
(2) 돈대가 본격적으로 축조된 것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 후
(3) 1871년 신미양요 때 격렬히 전투
2) 남해안 왜성
(1) 임진왜란 초기 : 몇 군데 ~ 정유재란 : 본격적 축조
(1) 육지나 바다에 바로 접한 곳도 있고, 비상시에 배를 탈 수 있는
접안(接岸) 시설을 갖춘 곳도 더러 있음
(1) 천수각 : 장수가 지휘하는 왜성 중심부 높은 곳
(2) 계단식 성벽을 겹겹이 쌓아 안으로 들어가려면 여러 번 방어망을
뚫어야 하는 구조로 조명(朝明)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 안 됨
10.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남긴 흔적으로, 전통적 성곽과 다른 모습
을 한 방어시설은? 4
① 돈대 ② 장대 ③ 화성 ④ 왜성
【해설】 돈대
- 조선 후기 국방을 위해 만들었다. 돈대가 본격적으로 축조된 것
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 후 1697년(숙종 5)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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