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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대, 역사, 교양 등 유럽이 보이는 유럽 바로 알기 요약 정리 14. 독일의 통일과 독일제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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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강. 독일의 통일과 독일제국의 성립 

I. 서론: 문제의식

1870,71년 중부유럽에서의 독일제국 성립 과정은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하나의 민족으로서 통일된 국가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었는가? 아니면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하는 근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가 탄생하는 과정이었나? 우리는 독일민족국가의 탄생이 19세기 후반 단기간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기보다 19세기 초반 이래 지속된 긴 민족운동의 결과였으며, 중부유럽을 둘러싸고 근대적 국가체제를 형성하는 중 이루어진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선택(Hagen Schulze)”, 즉 다수의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두 가지 관점에서 독일제국 성립의 의미와 그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II. 독일민족의 각성

1. “3월 혁명 이전 시기의 민족운동

19세기에 들어서도 중부유럽은 통일된 국가체계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비록 중세 이래 정치적 상부기관인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독자적인 영토국가를 형성한 각 군주국은 항상 제국 차원의 이해와 상반되고 있었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입과 이어지는 해방투쟁의 경험은 교양시민계층을 중심으로 문화적 정체성에 입각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815년 비인회의의 정치적 결정은 민족의식을 무시하고 중부유럽의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때 구성된 중부유럽의 새로운 체제인 독일연방(Der Detsche Bund)39개의 주권국과 도시들이 참여한 느슨한 조직망으로, 통일된 주권국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여전히 군주들의 연방이었으므로 프랑스혁명으로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다시 억압 체제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중부 유럽에서는 대학생, 시민들, 수공업자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및 자유주의적 비판 세력이 결집하여 자유와 동시에 통일을 기치로 투쟁하기 시작했으며, 시국집회 형식의 결집과 아울러 민족이념의 고취를 위한 각종 기념물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들 사업은 명백히 과거 독일민족의 역사를 되찾는 행위라기보다는, 관련성이 희박한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목적에 맞게 새롭게 각색하는, 따라서 새로이 만들어지는 민족운동에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 전통을 발견하는”(E.J. Hobsbawm) 것이었다.

 

2. 1848년의 3월 혁명과 민족문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함께 독일에서도 반민족적이고 반자유주의적 질서의 타도 요구가 나타나면서 양대 세력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 증폭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의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518350명의 의원으로 프랑크푸르트의 국민의회가 공식적으로 개회되었다. 대의원들은 대부분 명망 있는 독일 자유주의적 지식인들로 전 독일적 자유헌법과 하나의 독일 정부를 지향했다. 의회가 개회된 지역적 봉기가 군주들의 부분적 양보로 진정되면서 혁명은 의회의 차원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의 미래 형태에 대해 아직 통일된 의견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대독일의 해결방안과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 해결방안이 경쟁했으며, 의회가 채택한 헌법은 실질적 효력도 강제력도 갖지 못했다. 그 사이 프로이센에서는 군대가 투입되면서 혁명이 사실상 종결되었고, 의회는 프로이센 왕에게 소독일제국의 황제 타이틀을 부여함으로써 권력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거부로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무의미해졌으며, 독일 민족문제의 해결은 모호해졌다.

 

3. 혁명이후 소독일주의를 향한 조건의 성숙

1848,49년의 혁명은 표면적으로 보면 명백한 실패였지만 소독일 혹은 대독일이라는 두 개의 구체적 대안을 얻으면서 문제 해결 가능성의 윤곽을 뚜렷이 했다는 변화를 가져왔다. 혁명기간 동안 형성되었던 민족운동 진영은 조직적 차원에서도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와 농민, 노동자, 수공업자 및 각종 직업의 전국적 연맹 등 기반을 보강했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와의 적대관계도 민족주의적 정서를 제공했다.

특히 자유주의적 지식인 및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소독일적 전망이 힘을 얻고 있었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연방 국가들의 경제적 관계를 증진시킨 관세동맹의 활성화와 산업의 발전이 첫 번째 요인이었다. 특히 1835117일에 시작된 철도건설의 성과는 독일의 경제적 통일과 산업화에 눈부신 성과를 가져다주었고 프로이센의 경제적 우위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복고적 오스트리아에 비해 프로이센에서 제한적이나마 자유주의적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희망에, 독일인들에게는 입헌 군주정이 가장 적합하다는 합리화의 논리가 추가되었다. 또한 남독일의 가톨릭에 대항하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티즘만이 진정한 독일정신의 구현이라는 생각이 성장하고 있었다.

 

III. “철혈정치와 독일제국의 성립

1. “철혈정치와 그 의미

소독일적 통일을 향한 정치적 결정의 중심에는 프로이센의 역량 있는 정치가와 군인들이 있었다. 1862년 프로이센 내각의 수상으로 임명된 비스마르크의 의회 연설에 나타난 냉철한 정치적 현실주의는 프로이센의 지도력을 드러냈다. 프로이센의 지주계급 융커출신으로 군국주의와 보수주의를 신봉하던 비스마르크는 입각 후 현실적인 국가이해를 쫓는 권력 지향적 정치가로 변신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적 변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어왔다. 1815독일연방은 중부유럽의 분열을 영구화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이상에 치우치긴 했지만 국민주권과 인권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인 근대 민족국가 건설 역시 대안으로 제시됐다. 또한 오스트리아를 주축으로 뵈멘(Böhmen)과 북부 이탈리아 지방을 포함하자는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중간크기의 독일 국가들이 지지하는 제3의 독일 건설방안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통일보다 유럽 내부에서의 프로이센의 권력 확대와 공고화를 지향했다. 이를 위해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희생을 딛고 독일 내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해야 했고, 이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소독일적 통일 전망과 상당히 일치될 수 있었다.

 

2.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을 향한 길

또 한 가지 긍정적 조건은 1853년 크림전쟁(1853-1856)으로 지금까지 독일통일을 견제하고 저지해왔던 유럽 강대국들의 연합전선에 생긴 균열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불신의 골이 생겨났다. 프랑스 역시 비인과 베를린 사이의 패권다툼 속에서 프랑스의 소득을 기대하며 독일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특히 덴마크 영토였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두 공국에 대한 프로이센의 이중 플레이는 크림전쟁으로 인한 유럽협조체제의 교란을 가시화시켰다.

비스마르크는 원래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적 민족국가 건설이 아니라 두 양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영향권의 분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866년 해묵은 불안정한 세력균형이 결국 전쟁으로 폭발했고,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탈리아가 프로이센을 지지하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군대 훈련 및 기술면에서 우월했던 프로이센의 대승으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에서 주도권을 상실했고, 독일연방도 의미를 잃었다. 대신 마인 강 이북의 22개 군소국가가 프로이센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헤게모니 아래에서 북독일 연방이라는 일종의 국가연합체를 형성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비스마르크의 분명한 성공에 지지를 보내면서 심지어통일을 통해 자유라는 구호 아래 방향을 바꾸기까지 했다. 소독일주의 방식의 통일을 향해 위로부터의 정치적 결단과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서로 타협했던 것이다.

 

3. “민족의 적프랑스와의 대결 그리고 제국의 건설

나머지 수순은 프랑스와의 대결이었다.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독일민족의 각성과 하나의 감정적 정서로서의 민족의식은 외부의 프랑스와의 대결과정 및 축적된 적대의식을 통해서 강화되었다. 전쟁의 빌미는 외교적 대결에서 제공되었다. 북독일 연방이 창설된 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814년 당시의 국경선 회복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면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은 크게 손상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70년 스페인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의 갈등 증폭을 전쟁으로 유도했으며, 참패한 프랑스는 독일통일을 방관해야 했다.

전쟁 중 독일 국가들 사이에 민족적 열기와 통일을 향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고조된 국민들의 민족적 감정과 여론은 남부독일 국가들의 통치자들과 각료들에게 강력한 압력을 행사했다. 1870년 겨울 남부독일국가들과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1871118일 전쟁이 아직 종결되기도 전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빌헬름 1세를 독일의 황제로 선언하였다.

 

IV. 결론: 통일된 독일민족국가의 실체

새로 탄생한 독일제국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독일민족의 국가도 아니었고, 또한 프로이센만의 제국도 아니었다. 물론 프로이센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지만 통일은 독일 민족운동 세력들이 전파하기 시작한 민족의 이념, 즉 단순한 정치적 통합의 차원을 넘어 민족의 신화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세대에 걸쳐 낭만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나 신화를 통해 중세 독일제국의 영광과 그 부활을 꿈꾸어왔던 독일 민족이념의 추종자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민족이념의 실현뿐 아니라, ‘자유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상, 즉 모든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인정받는 민주적인 통일독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프로이센의 주도권이 관철되었던 통일된 독일제국의 정치는 19세기 이래 자유주의적 민족운동세력들의 이상과는 먼 것이었다. 아울러 가능한 정치적 대안 중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점차 종족적이고 인종적인 민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해 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요컨대 그 탄생과정의 정치적 성격을 인정하기보다는, 종족적, 문화적 단일성에 근거한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에 점차 노출되고 있었다.


14<연습문제> 독일의 통일과 독일제국의 성립

1.1815년 비인회의의 정치적 결정으로 구성된 독일연방 (Der Detsche Bund)에 대한 설명으로 합당하지 않은 것은? -3

주권국과 도시들의 느슨한 조직망이었다.

군주들의 연방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통일된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의식을 무시하고 중부유럽의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취지에 의거한 것 이었다.

2. 1815년 빈회의의 정치적 결정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한 것은? -4

독일의 민족의식을 존중했다.

중부유럽에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탄생시켰다.

독일인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했다.

39개의 주권국과 도시들이 참여한 느슨한 조직망으로 이루

어진 독일연방을 성립시켰다.

3. 18481849년의 혁명 이후 프로이센 중심으로 통일을 추구하는 소독일주의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로 합당하지 않은 것은? -4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관세동맹의 활성화 독일 철도건설의 성과

입헌 군주정에 대한 지지 가톨릭에 대한 집착

4. 1871년 새로 탄생한 독일제국에 대한 다음의 설명 중 합당하지 않은 것은? -2

권위주의적 프로이센의 주도권이 관철되었다.

자유주의적 민족운동세력의 이상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독일민족의 국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점차 종족적이고 인종적인 민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해 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5. 187071년에 완성된 독일통일에 대한 설명으로 합당한 것은? -2

독일 및 중부 유럽을 둘러싸고 추구되었던 여러 가능한 대안 중의 하나였다.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한 소수 정치가들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민족운동 세력들의 이상에 거의 일치했다.

프로이센의 주도권은 전면 배제되었다.

6. 다음 중 1871년에 수립된 독일제국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합한 것은? -4

진정한 의미에서 독일민족의 국가라 할 수 있다.

모든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인정받는 민주적인 체제였다.

현실의 독일제국은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었음을 분명히 인정하는 체제였다.

권위주의적 프로이센의 주도권이 관철되는 체제였다.

7. 다음 중 독일 통일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하지 못한 것은? -1

오스트리아와의 협조 속에 진행되었으며, 통일된 독일제국의 영토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했다.

자유주의자들의 궁극적인 지지를 획득했다.

독일통일을 견제해왔던 유럽 강대국들의 연합전선에 생긴 균열은 독일 통일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87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참패시키면서 통일을 완성시킨다.

8. 19세기 초 독일의 민족운동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3

이 시기 독일인들은 뚜렷한 하나의 민족석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민족 의식이 증가하고 있었고 이들은 민족운 동 세력을 형성 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민족해방투쟁은 다수의 독일인들 사이에 문화적 정체성에 입각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유럽 정치 질서의 핵심 세력들은 중부 유럽에서 민족국가가 탄생하는 데 적극협력했다.

9. 19세기 초반 독일의 민족의식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3

1815년 빈 회의의 정치적 결정은 민족 의식을 무시하고 중부 유럽의 분열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입과 해방투쟁의 경험은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교양 시민층은 민족적 통일을 위해 시민의 자유를 포기했다.

19세기 초 고무된 민족 의식은 독일인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것 이다.

10. 다음중 비스마르크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2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지주계급인 융커 출신으로 군국주의와 보수주의를 신봉했다.

그는 통일의 실현 가능성에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추진하는 그의 동력은 독일 민족의 이념이라기 보다는 프로이센 국가에 대한 봉건적 충성 의식이었다.

그는 제한적인 원칙 정치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적인 국가 이해를 좇았다.

11. 독일 통일과 관련된설명으로 옳은 것은?-2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독일 민족의 각성은 프랑스와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와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전쟁에 참여한 독일국가들 사이에 민족적 열기가

높아가면서 통일을 향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톡일 제국 건설의 과정은 독일 민족운동 세력들의 요구와 전혀 무관한 것이 었다.

독일 제국은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통일 이후 더 이상 프로이센의 주도권이 관철될 수 없었다.

12. 다음 독일통일을 앞두고 방안 중의 하나로 제시되었던 소독일 주의에 대한 설명

적합한 것은? - 4

오스트리아 중심의 해결방안이었다.

자유주의적 지식인 및 부르주아들은 거부하는 방안이었다.

가톨릭적인 정서에 입각한 방안이었다.

프로이센의 군사력과 경제적 우위가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13.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은 민족운동 세력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게도, ( )의 주도권

이 관철되는 권위적인 국 가였다. 아울러 점차 종족적이고 인종적인 민족이데 올로기 를 강화해 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2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실레지아 바이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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