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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대, 역사, 교양 등 유럽이 보이는 유럽 바로 알기 요약 정리 13.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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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강.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1. 머리말

종교개혁의 본고장인 독일은 전역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한 종교전쟁인 30년 전쟁(1618-48)을 거치면서 더 이상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남독과 북독간의 종교적 차이는 양 지역 간의 정서적, 문화적 차이의 고착화에 크게 기여했다. 16세기 종교개혁과 17세기 30년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지방분권적인 독일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다.

 

2. 종교개혁

1) 독일 종교개혁의 진행과정

중세 이래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아니라 다수의 세속, 종교 제후들에 의한 분할 지배가 이루어졌다. 더욱이 황제가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7선제후3명이 종교제후로서 종교제후들의 권한이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더 강력했다. 종교개혁 직전 독일에서는 확고한 중앙권력의 부재와 종교제후들의 막강한 권력으로 면죄부 판매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신속하게 독일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최신 기술인 활판 인쇄술을 이용, 출판됨으로써 독일 전역에 급속도로 유포되어 나갔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혁명에만 국한되지 않고 농민전쟁(1525)을 촉발했다. 농민전쟁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종교개혁의 승패 여부는 제후들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황제와 가톨릭 제후들이 보름스 칙령의 원칙(루터의 저서들을 모두 불태우라는 결정)을 재확인하자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와 도시들은 이 조처에 항의(Protest)하였는데 여기에서부터 개신교도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유래했다. 개신교 진영은 1531슈말칼덴 동맹이란 군사적 동맹체를 결성하여 황제진영에 대항했고, 이에 맞서 황제도 교황과 동맹을 체결했다.

어느 쪽도 제국에서 결정적인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었고 양 진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화의를 통해 타협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신앙 속지주의 원칙을 수립한다. 그러나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인정한 것도 아니었고 제국의 종교적 분쟁이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2) 제국의 종교, 정치, 사회적 분열

신구교간의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1580년대의 달력 논쟁은 당시의 종교적 분열상이 종교적 문제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정치적으로도 신구교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608년 팔츠 선제후가 이끄는 개신교 제후와 도시들이 개신교 연합(Union)’을 결성하고 그 다음해에 바이에른 공작을 중심으로 가톨릭 연맹(Liga)’이 결성되어 결국 30년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서로 격돌하게 되었다.

 

3. 30년 전쟁

1) 30년 전쟁의 진행과정과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이 전쟁은 보헤미아에서의 종교적 갈등으로부터 촉발되었다. 15세기 후스주의 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보헤미아 지역의 귀족들은 개신교도가 많았던데 비해 통치자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강요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칼뱅주의자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의 새 국왕으로 추대하고, 개신교 연합은 보헤미아를 동맹세력으로 받아들이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합스부르크가의 또 다른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던 스페인도 개입했고, 북서 독일 지역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신교도로서 전쟁에 개입했다. 가톨릭 측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던 상황은 독실한 루터 교 신자인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가 개입하면서 다시 반전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패권을 저지하려는 프랑스로부터 상당 부분의 전비지원을 받은 스웨덴 군은 탁월한 군사적 전술로 연전연승하며 남부 독일에까지 깊숙이 진출했다. 하지만 구스타프 아돌프와 가톨릭 측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이 모두 죽음으로써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강화조약의 논의가 진행되던 중 프랑스가 참전함으로써 전쟁은 10년 이상이나 더 지속되며 유난히 파괴적인 양상을 보였다.

16481024일 두 도시(베스트팔렌 지역의 주교도시 뮌스터와 개신교 도시 오스나브뤼크)에서 동시에 조인된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의 신앙 속지주의 원칙이 재확인되고 칼뱅파가 가톨릭, 루터파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제국의 종교적 통일성 회복은 요원해졌다.

강화조약을 통해 이득을 본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인접 국가들인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와 스위스였다. 한편, 제국의 제후들은 명분상으로는 황제의 봉신이었지만 사실상의 주권을 획득하여 황제의 권력은 축소되고 제국의 분열은 고착화되었다.

 

2) 30년 전쟁기의 용병부대의 모습

30년 전쟁에 가담했던 국가들은 오늘날과 같이 정규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치렀다. 각국 정부들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돈 많은 재력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발렌쉬타인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또한 화승총과 대포 등 무기체계도 많은 발전을 보였다. 30년 전쟁 이전에는 만 명 이상의 병력이 전투에 투입된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병참이라는 개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주된 전쟁터였던 독일의 주민은 전쟁분담금 뿐 아니라 용병부대의 약탈로 시달리면서 극단적인 황폐를 경험했다.

 

4. 맺음말

16-17세기의 역사는 독일사의 기본 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1517년 종교개혁이 시작되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독일은 심각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분열을 경험하였다. 외국군대의 개입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독일 제후들은 강력한 국가와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독일 북동부의 변방국가에 불과했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를 얻기도 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권과 가톨릭을 구심점으로 하여 독일을 통합코자 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도가 30년 전쟁으로 실패하면서 보편 제국과 보편 종교의 이상은 쇠락하였다. 1648년 이후 19세기 초에 이르는 독일에서는 제후들이 통치하는 개별 영역국가들이 역사의 주역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확고한 지방분권적인 체제에 입각한 연방제가 유지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유럽이 진정으로 기독교화된 것이 바로 이 시기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적 대립을 거치면서 독일인들은 신앙의 폭력적인 강요가 가능치 않음을 깨달았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종교적 관용은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회를 세속화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연습문제> 13 장 종교개혁과 30년 전쟁

37. 30년 전쟁 당시 활용되었던 용병들과 관련하여 적합하지 못한 설명은? (3)

용병부대의 유지비용을 위하여 돈 많은 재력가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용병부대는 다수의 민간인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독일 주민들은 용병들의 무차별적인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용병들에 대한 급료와 제복은 정확하고 규칙적으로 지급되었다.

23. 종교개혁 직전의 독일 상황과 무관한 설명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고 있었다.

황제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수의 세속, 종교 제후들에 의한 분할 지배가 이루어졌다.

종교제후들의 권한이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더 강력했다.

25. 종교개혁이 독일에 미친 영향력 대한 설명으로 적합하지 않은것은?

독일 전역을 거의 초토화시켰다.

남독과 북독간의 정서적 문화적 차이를 크게 고착화시켰다.

독일의 종교적 통합을 더욱 공고하게 했다.

독일의 정치적 분열을 강화시켰다.

 

27. 다음중 30년 전쟁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외국의 군사력이 전면 개입했다.

독일 제후들이 강력한 국가와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회를 얻었다.

전쟁은 정규군을 통하여 수행되었다.

 

22. 독일 30년 전쟁(1618-48)이 독일 역사에 초래한 결과로 적합한 서술은?

독일의 종교적 통일을 강화시켰다.

남독과 북독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완화시켰다.

독일의 중앙집권화를 강화시켰다.

사회의 세속화에 기여했다.

 

23. 다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물은?

 

30년 전쟁 당시 용병대장. 동부 보헤미아의 지방 귀족의 아들로 본래 개신교도였지만 보헤미아 반란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편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부와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스웨덴 군의 개입을 계기로 30년 전쟁의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의주도권을 장악했지만 그의 배신과 야심을 의심하던 황제에 의하여 해임되고 암살당했다

발렌슈타인 헤르베를레 페르디난트 아돌프

 

24.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은?

신앙 속지주의 원칙 개인의 신앙적 자유

종교적 분쟁의 완전 해결 가톨릭 측의 주도권 확립

57.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화의와 관련하여 적합한 서술은? (4)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제국의 종교적 분쟁이 완전히 해결되었다.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 이외의 모든 기독교 교파는 금지되었다.

58. 다음 괄호 속에 들어갈 말로 적합한 것은? (3)

 

중세 이래로 독일은 ( )제국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아니라 다수의 세속, 종교 제후들에 의한 분할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황제

는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7선제후3명이 종교제후로서, 종교제후들의 권한이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더강력했다. 종교개혁 직전 독일에서는 확고 중앙권력의 부재와 종교제후들의 막강한 권력으로 면죄부 판매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성로마 동로마 서로마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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