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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대, 역사, 교양 등 유럽이 보이는 유럽 바로 알기 요약 정리 11. 스페인 민주주의와 과거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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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스페인 민주주의와 과거청산 

I.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 나서부터 82년 사회노동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까지를 스페인 역사에서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transición)라 부른다. 거의 40년 동안 완강한 독재 체제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타협과 협상에 의해, 지나친 혼란이나 인명 희생 없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비교적 안정되고 보편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행했던 과거의 청산’, 즉 수많은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자들은 이와 관련한 일련의 정치적 결정들을 망각협정이라 부른다.

 

II. 40여년에 이르는 프랑코 독재체제는 19세기 이래로 누적되고 심화되어 온 두 스페인’, 즉 좌파와 우파 간의, 혹은 진보와 보수 간의 오랜 대결의 정점이며,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스페인 내전(1936-39)의 산물로서 승자인 프랑코 장군 측이 패자들의 잔재를 근절하기 위해 벌인 폭력과 테러였다. 프랑코 독재체제는 군대와 파시스트적 유일 정당인 팔랑헤(Falange), 대지주, 대사업가, 그리고 가톨릭교회를 권력기반으로 하여 억압적 지배를 강화해 나갔다. 사회 지배계급으로 군림하였던 이들 집단의 정점에서 프랑코는 철저한 1인 독재, 의회 민주주의의 부정, 정당과 노조의 부재, 노동운동의 불법화, 지역 자치의 억압, 철저한 외교적 고립, 언론출판신앙의 자유 억압, 그리고 자급자족적 경제 체제를 실시하였고 이는 그에 따른 혹독한 빈곤과 함께 1950년대 중반까지 스페인 사회의 특징을 규정지었다.

50년대 후반 이후 스페인 사회에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독재 정권은 경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체제에 대한 국민의 지지 확대 및 지배 강화를 위해서 조심스런 제한적 자유화, 개방의 길에 나서야 했으며 이후 1960년대에 이른바 스페인의 경제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정권은 자유와 개방의 조처들이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 문화, 혹은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질 것에 대한 우려와 예방을 하였다. 우려는 현실화되었고, 경제발전은 스페인 사회에 커다란 사회문화적 변화를 동반하였으며 또 다시 원기를 회복한 지역(카탈루냐, 바스크 등) 민족주의의 도전에도 직면해야 했다.

 

III.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잠재적인 도전 내지 장애가 극복되어야 했다. 첫째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군부였다. 두 번째는 지역 자치 문제(특히 카탈루냐와 바스크)였으며, 세 번째는 정권교체의 문제로서, 총선 결과 제1 야당으로 부상한 사회노동당 등 좌파의 집권에 대한 군부 등 수구 세력의 용인 여부였다.

간단히 살펴보면, 정부는 카탈루냐와 바스크에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쪽으로 일을 추진해 나갔는데, 카탈루냐와의 관계는 성공적으로 해결된 데 비해 바스크와의 협상은 실패하여 지금까지도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군부의 불만은 81223일 쿠데타로 폭발했으나 몇 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온건 좌파인 사회노동당이 온건화, 정치적 중도화를 통해 신뢰를 확보하여 1982년 좌파 정당으로의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IV. 프랑코 체제를 지지해 온 세력들은 왜 프랑코 사후 독재 체제를 포기하고 타협에 의한 민주주의로의 길에 나섰으며, 또한 좌파 반대 세력은 왜 개혁을 주도해간 체제 추종 세력에 협력하였는가? 이에 대한 기존의 설명틀 중 하나는 1960년 이후 75년까지 프랑코 치세 후반 민주화를 불가피하게 했다는 상황 변화에 주목해왔다. 1960년대에 나타난 경제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 60년대 이후의 민주적 저항 세력의 성장 등에 의한 노동자와 대학생, 그리고 지역적 민족주의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스페인의 민주화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국제적 환경이 스페인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의 인식은 이 요인들이 민주화에 대한 부분적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선 1960년대 경제 발전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층은 프랑코 정권에 적극 협력하였고, 민주화를 강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제 발전과 생활수준 향상으로 체제 반대 세력이 성장했던 이면에 체제의 정당성이 강화된 측면도 있었다. 한편 저항 세력은 프랑코 집권 마지막까지 안정된 통제와 탄압, 그리고 내적인 분열로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코 치세 전 기간 동안 국제 사회의 압력이 국내 정책에 큰 변화를 가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프랑코 체제의 지지 집단 내 분열이 주목된다. 프랑코 독재 정권 내에는 여러 정치적 세력군들, 식구들’(familias)이 있었다. 보수적이지만 본질적으로 관료제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던 군부, 후안 카를로스 지배 하의 권위주의적 왕정을 지향하였던 오푸스데이 기술 관료들, 민주화지지 세력과 체제 지지 세력으로 뚜렷하게 양분되어 있었던 가톨릭교회, 그리고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젊은 세대와 강경노선을 지향하는 구세대로 양분되었던 모비미엔토(과거의 팔랑헤) 등이 그들이었다.

60년대 후반 이후 두 가지 중요한 긴장이 식구들간의 결속을 크게 약화시켰다. 첫째, 어떤 식구도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힘의 균형 유지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둘째, 프랑코 체제의 정치 집단 내의 혼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체제 내 세력들의 심각한 내분을 가져왔다. 프랑코 사후 우파는 커다란 위험부담이 따르는 과도한 탄압없이는 기존 체제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취약했던 좌파 반대 세력 역시 터져 나오는 민중들의 민주화 열정을 독재 정권 타도로 이어나갈 역량이 부족했다. 또한 주로 군부와 경찰 간부들을 겨냥한 바스크분리주의자들의 빈번한 테러는 상황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스페인의 민주화는 이런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배태된 타협의 산물이었다. 좌파나 우파나 주도권을 잡지 못하여 양 진영의 온건 개혁 세력들, 특히 우파 주도에 의한 타협을 통한 체제 주도적 이행에서 과거와의 갑작스런 단절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이는 스페인 민주화의 성격을 규정한 요인이 되었다. 평화와 질서, 안정을 위해서 대결과 양극화보다는 대화와 타협이 모색되어야 했던 것이다. 일반 국민들 또한 내전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V, VI. 스페인의 민주화는 하나의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재체제가 자행한 수많은 인권유린과 그로 인한 깊은 상처에 대한 망각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이행기적 상황에서 망각협정의 불가피성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비정상적 상황의 산물인 망각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1990년대 말 이후 기억 회복 과정은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과거 청산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스페인의 예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연습문제 > 11장 스페인의 민주주화와 과거 청산

1. 다음 중 1975년까지 존속된 프랑코 체제를 지지하고 있던 식구들로 보기 어려운 항목은?

군부 사회주의자 오푸스데이 기술관료들 가톨릭 교회 바스크분리주의자

2. 1975년후부터 1982년까지 스페인에서 전개된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하지 못한 것은? (4)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1982년 사회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 되었다

40년간의 독재 체제가 청산 되었다 수 많은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준엄한 책임추궁이 이루어졌다

3. 다음 중 스페인 프랑코 독재 체제의 속성과 관련하여 적합하게 지적한 항목은? (3)

노동운동의 합법화 정당의 부재 지역자치의 허용 자유무역주의

4. 다음에서 설명하는 인물은? (2)

스페인의 군인이자 독재정치가로 스페인의 섭정겸 수상을 지냈다 1936년 총선거에 인민전선파가 승리하자 중앙의 정치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1936년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군대를 이끌고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봉기 (스페인 내전)를 일으키면서 국민정부의 주석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해8월 스스로 에스파냐파시스트당의 당수가 되어 독재정치를 확립 하였다 2차 세계 대전중에는 같은 파시스트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에 동맹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로 측면 지원하였으며 전세가 변함에 따라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스페인을 유럽 유일한 군사독재국으로 유지해

나갔다 1947년실시된국민투표에서 종신 섭정이 되어 죽을때까지 계속 정권을 잡았다 그가 사망한 1975년에 스페인은 왕정으로 재환원 됐다

카잘스 프랑코 카를로스 피카소

5. 1975년부터 1982년까지의 스페인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부적합 한것은? (3)

1982년 사회노동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타협과 협상을 통해 지난 40년간의 독재체제를 청산하고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민주주의로의 이행기라고 불리운다

철저한 과거 청산을 이루었다

6.1837년 스페인 내전 중 독일 비행기들의 무차별 폭격으로 주민의 절반 이상이 희생되었으며, 피카소가 회화를 통하여 고발하기도 했던 대학살이 벌어졌던 곳은? (3)

바르셀로나 세비야 게르니카 마드리드

7. 다음 중 스페인 프랑코 독재체제의 권력기반으로 볼 수 없는 집단은? (2)

군대 대지주와 대사업가 노동조합 가톨릭교회

8. 프랑코 독재 체제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3)

스페인 내전의 산물이었다.

엄청난 테러와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았다.

체제의 안정을 위해 제한적인 자유화와 개방의 길이 선택되기도 했다.

9. 1975년 독재자 프랑코의 사망 후 1982년 사회노동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이른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동안에 일어난 일로 볼 수 없는 것은? (3)

독재체제가 해체되고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82년에는 사회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대화와 타협 및 협상에 입각한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철저한 과거청산 및 보상이 이루어졌다.

11. 다음 중 스페인(에스파냐) 민주화의 제반 요인들과 전혀 무관한 것은? (3)

노동자와 대학생, 그리고 지역적 민족주의자 등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압력

국제사회의 외교적 압력

스페인 가톨릭교회 세력의 단결

프랑코 체제의 지지 집단 내 분열

12. 1075년 이후 진행되였던 스페인 민주화에 대한 설명으로 적합한 것은?

철저한 과거 청산이 이루어 젔다.

인권 탄압 등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망각을 대가로 민주화가 이루어 졌다.

지나친 혼란과 인명 회생을 동반 하였다.

보편적 지지를 받지 못하여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이다.

13. 괄호 안에 들어갈 말로 적절한 것은?

스페인 역사에서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나서부터 1982년 사회노동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 질 때 까지를 ( )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이 시기에 과거 문제 해결을 지향하며 나타난 일련의 정치적 결정들을 ( )이라고 부른다.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평화협정 민주주의로의 이행기, 민주화 협정

민주주의로의 이행기, 망각협정 전체주의로의 이행기, 타협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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