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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정리

한국사, 한능검, 공무원, 사학, 방통 등 한국문화와 유물유적 요점 정리 2. 종묘와 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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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종묘와 사직

종묘
사직


1.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 종묘와 사직
v 좌묘우사(左묘右사) : [종묘]-[경복궁]-[사직] -> 5묘 제도
종묘건물, 종묘제례, 종묘제례약 세계문화유산 등재
종묘제례 :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
1) 유교문화의 정수가 구현된 공간
2) 조선시대 종묘와 사직의 위상

구분 종묘(左) 사직(右)
대상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
봉안, 제사
사(社-토지) + 직(稷-곡식)
-국가의 안녕, 농사 풍요
효(孝)-조상 농업-백성
공통 주관-국가 / 격-대사(大祀-가장 높음) / 음악-예,악
위상

국가의례 : 종묘<사직

왕실 조상의 제사 국한  하늘제사 + 땅 제사
실질적 운영 : 종묘>사직

1. 동아시아 유교문화와 왕실문화, 농업사회적 특징이 종합적으로 깃
든 문화공간은? 1
가. 종묘 나. 사직 다. 사찰 라. 성곽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라, 가

2. 종묘와 사직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내용은? 2
①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② 사직은 민간에서 주관하여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다.
③ 종묘 제사는 국왕이 자신의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는 통로였다.
④ 사직은 유교문화의 경제적 기반인 농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해설】 종묘와 사직은 국가 주관이다.
3. 조선시대 종묘와 사직의 위상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 된 것은? 3
① 종묘와 사직의 위상에는 차이가 존재하였다.
② 사직 제사와 위상이 종묘 제사보다 높았다.
③ 실질적인 운영에서 사직 제사가 종묘보다 중시되었다.
④ 사직 제사는 종묘보다 공적 성격이 강하였다.
【해설】 실질적인 운영에서는 종묘가 중시


2. 종묘


1) 종묘의 유래와 변천
(1) 유례(어원) : 태묘(주 나라가 주공을 노 나라에 봉하면서 태묘가
노나라 주공의 사당을 뜻하게 됨)

 

(2) 구조 : 동상이실, 서상 구조
- 동당이실 : 하나의 묘에 2개의 실
- 서상 : 서쪽 끝이 가장 높은 신위 (살아서는 동쪽이 가장 높음)
- 대실 7칸 중 5칸은 석실(5묘 제도), 종석 : 신주를 석실에 보관
- 담장 안
정전, 공신당, 신문, 동문, 서문
- 담장 밖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
- 월랑
비와 눈을 피하기 위해 태종 때 지음

 

(3) 변천 (5묘-제후국 -> 7묘 황제국, 고종)

태조 명종 임진왜란 영조 헌종
7칸 4칸 소실, 재건 4칸 4칸
  11칸 11칸 15칸 19칸

- 고요함을 숭상하기 때문에 증축은 굉장히 신중한 사항
- 물자조달의 어려움으로 황장목-> 소나무로 변경
- 서쪽에 영녕전이 있어 동쪽으로만 증축 가능해 동쪽 담장 밖
부속건물을 옮겨야 하는 불편함
- 친진
(親盡 : 제사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됨, 4대)이 된 국왕은 후대
의 국왕과 신하들이 공덕을 평가해 종묘 정전에 계속 봉안할지
결정-> 불천지주
(친진이 되면 영녕전으로 옮겨져야 하나 공덕이 높은
왕은 정전에 계속 남아있음)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7 17 18 19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선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태조 불천지주(不遷地主)-세실 1
1세 1세 1세 1세 1세

<서쪽이 상위>


2) 영녕전의 건립과 운영
v 영녕(뜻 : 조종과 자손이 함께 편안하다.)
(1) 건립
- 종묘 정전에서 4대가 지나 친진이 된 신주를 옮겨와 봉안
- 세종 때 태조의 추존 4대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목조, 익조, 도조, 환조)

5 6 7 8 9 10 1 2 3 4 11 12 13 14 15 16
정종 문종 단종 덕종 예종 인종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명종 원종 경종 진종 장조 영친

<가운데가 상위>


(2) 구조(봉안 순서 : 동협실-> 서협실)

변천과정 서협실 정전 동협실
초기 1칸 4칸 1칸
성종 +1=2칸 +1=2칸
임진왜란 후 +1=3칸 +1=3칸
현종 +1=4칸 +1=4칸
헌종 +2=6칸 +2=6칸
현재 6칸 4칸 6칸

6. 영녕전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맞지 않는 것은? 3
① 종묘 정전에서 친진이 된 신주를 옮겨와 봉안하는 사당이다.
② 세종 대에 태조의 추존 4조만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③ 건립 초기부터 좌우 협실은 오늘날과 같이 각 6칸이었다.
④ 신위는 먼저 동협실에 봉안되었다가 실이 다 차면 서협실로 옮겼다.
【해설】 초기-1칸, 성종-2칸, 임진왜란 후-3칸, 현종종-4칸, 헌종-6칸

5. 종묘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4
① 종묘 정전은 동당이실의 구조에 맞춰 건립하였다.
② 태종 대에 비와 눈을 피하기 위한 동서 월랑을 지었다.
③ 세실(世室)로 정해지면 5묘의 대수(代數)에서 제외되었다.
④ 영녕전이 동쪽에 있어 종묘 증축은 서쪽으로만 가능하였다.
【해설】 서쪽에 영녕전이 있어 동쪽으로만 증축 가능


3) 공신당과 칠사당(일곱 신)

구분 공신당(배향당) 칠사당
대상 역대 군왕들이 재위에 있을 때 가장 공이 큰 신하 일곱신
위치 왼쪽(동쪽) 오른쪽(서쪽)
특징 봉안된 군주가 불천지주
-> 공신당에 남음 X 위판을 본가 자손
 
기타 정전이나 영녕전에 비해 한 단계 낮은 격 (전>당)

4. 종묘 정전에서 친진이 된 신주를 옮겨 와 봉안하는 사당은? 1
① 영녕전 ② 공신당 ③ 배향당 ④ 칠사당
【해설】
공신당 : 역대 군왕들이 재위에 있을 때 가장 공이 큰 신하
배향당 : 공신당은 배향이라고 하기도 함
칠사당 : 일곱신을 모시는 당
v 칠사당의 일곱 신

일곱신 담당 제사시기
사명지신 궁중의 낮은 신, 삼명을 살핌
사호지신 출입
사조지신 음식 여름
중류지신 건물 실내 거처 주관 6월 토왕일
국문지신 출입 가을
공려지신 살벌(殺伐)
국행지신 도로 통행 겨울

7. 종묘 정전의 서쪽에 위치했으며, 조선시대 국가전례서에 기록된 일
곱 신을 모셨던 곳은? 4
① 악공청 ② 찬막단 ③ 성생판 ④ 칠사당
4) 부속 건물과 기타

악공청 종묘제례 시 악공들이 악기 준비 및 대기
수복방 종묘를 지키는 사람들의 거처
전사청 신주(神廚)-종묘 제사 음식 준비
찬막단 전사청에서 만든 제수를 진설해 놓고 살핌
제정 제사 명수와 음식 마련에 필요한 물 조달 하는 우물
성생판 종묘 대제에 사용할 소, 양, 돼지 적합한지 살핌
재궁 제사 전 국왕의 목욕재계, 의복 정제
망묘루 종묘를 살펴보는 관청 종묘서->종묘관리
향대청 향(香), 축문(祝文), 폐백 보관

8. 종묘 제사에 사용되는 음식을 만들던 부속건물의 명칭은? 2
① 향대청 ② 전사청 ③ 망묘루 ④ 수복방


3. 사직
1) 고대~고려 : 사직의 탄생과 변천
(1) 우리나라 사직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시작
- 사직단의 모습, 제사의식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전해지지 않음
(2) 고려시대에 구체적으로 확인됨
- 991년(성종) : 개성-불은사 서동
- 1052년(문종) : 개성 안 서쪽에 새로운 사직단 건립
(3) 고려시대 사직단(황제국 제도를 따름)
- 사단과 직단의 따로 만들어짐
- 각각 길이 5장, 높이 3장 6촌, 단의 사방에 계단 설치 : 조선의 약 2배
2) 조선 : 사직의 건립과 정비
(1) 1395년, 고려의 절반 규모, 형태는 고려를 따름
(2) 태종 대 부터 사직 운영에 필요한 제도 정비 본격화
- 의식과 제도 중국 송나라 유 제도 도입
(3) 세종 대에는 집현전 설치,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제(古制) 연구 심화
- 한층 유교적으로 정비
- 사직 관리 전담 부서인 사직서 설치
- 위판 개정(제후국) : 국사지신, 국직지신-(태->국)
(4) 임진왜란, 병자호란이후 정비 사업 : 숙종 대~영, 정조
9. 조선시대 사직의 제도 변천에 대해 맞게 설명한 것은? 1
①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건립되었다.
② 지방 군현에 고을 단위의 사직은 설치되지 않았다.
X
③ 세종 대에 위판을 황제국의 격에 맞게 개정하였다. X 고종
④ 임진왜란 직후부터 파괴되었던 사직은 본격적으로 정비하였다. X
【해설】 사직제도 변천
-지방의 각 군현에도 고을 단위의 사직을 설치하여 봄, 가을에 제
사를 지내도록 함
-고종 대에 대한제국으로 격상되면서 황제국의 격에 맞게 개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크게 파괴된 사직이 본격적으로 정
비된 것은 전란이 끝난 130여 년 후인 17세기 후반 숙종 대 이후이다.
3) 대한제국기 : 황제국 제도로의 격상
(1) 제후국-> 황제국으로 바뀜에 따라 사직 또한 격상
- 명칭 : 국사지신-> 태사지신, 국직지신-> 태직지신
- 규모 : 이전에 비해 2배로 확대, 단의 계단 3개-> 5개
(2) 실질적 위상은 종묘, 영녕전보다 낮아짐
(3) 일제 강점기에 공원으로 바뀌면서 심각하게 훼손-> 복원사업 진행
10. 대한제국기 사직의 변화상으로 맞지 않은 것은? 2
① 사직의 외형적인 제도를 격상하였다.
② 사직의 실질적 위상이 대사(大祀)중에서 가장 높아졌다.
③ 사직의 위판 칭호는 ‘태사지신’, ‘태직지신’으로 변경하였다.
④ 사직 제도는 황제국의 격에 맞게 조정되었다.
【해설】 외형적 제도는 격상되었으나 실질적 위상은 가장 낮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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