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궁궐
v 궁궐의 의미 : 정치 및 국가의례가 행해지는 곳으로 왕조국가의
시대정신과 정치행위를 볼 수 있는 장소
1. 어원과 제도
1) 어원
宮 궁, 상형문자로 건물 안에 방들이 있는 모습을 본 떠 만든 글자
- 중국에서 진한 이전에는 ‘집’이라는 뜻으로 두루 사용되다가 한(韓)대
이후 황제가 자신의 집을 ‘궁’이라고 칭한 이래로 권위 있는 건물에만 쓰임
闕 궐, 방어를 위해 설치한 높은 전각에서 비롯된 글자
- 궐의 잔영 : 경복궁의 동, 서 십자각과 창경궁의 홍화문 양 옆의 각루
(1) 고려 : ‘궁’, ‘전(殿)’ 혼용하여 사용
- 국왕 이외에 왕실 구성원의 거주처들도 궁이라고 호칭되기도 함
(2) 조선 : 국왕이 상시 거주하는 곳 외에 별궁이나 행궁, 사당도 ‘궁’
이라고 칭함
(3) 궁궐의 기본 형식과 구성
- 전조후침(前朝後寢) : 앞쪽-조정(정치) / 뒤쪽 – 침전(생활)
- 삼문삼조(三問三朝) : 궁궐 안을 3개의 문, 3개의 구역으로 구성
v 조선 궁궐은 삼문삼조에 맞추어 해석할 수도 있고, 기능에
따라 구별해야 시대상에 더 맞는다는 주장도 있음
- 궁궐에는 생활공간, 의례공간, 정치공간이 혼재되어 있음
정전(正殿) - 국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과 함께 의례를 펼치는 공간 - 좁은 의미의 조정(朝庭)은 회랑으로 둘러 싸인 정전 일곽 편전(便殿) - 왕과 신하들이 만나 정사를 논하고 경연 을 펼치는 장소 생활 의례 침전(寢殿) - 국왕과 로 하는 왕후의 의례나 거처이며 연회의 중심장소 , 왕후를 중심으 생활 동궁(東宮) - 세자의 거주공간으로 궁궐 밖에 있거나 궁궐 안에 포섭되어 있기도 함 궐내각사/ 궐외각사 - 궁궐 안팎에 포진되어 있는 여러 관서 |
<확인문제>
1. 궁궐(宮闕)의 어원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2
① 宮은 중국 한 대 이후 평민의 집에 쓰일 수 있었다.
X 한대 이후 황제가 자신의 집을 ‘궁’이라고 칭한 이래로 권위 있
는 건물에만 쓰임
② 闕의 잔영은 경복궁 동, 서 십자각에서 볼 수 있다.
+ 창경궁의 홍화문 양 옆의 각루
③ 闕은 주거를 목적으로 설치한 건물이었다. -> 宮(궁)
④ 宮은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한 건물이었다. -> 闕(궐)
2.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큰 규모의 조회 의례를 펼치던 공간은? 1
① 정전(正殿) ② 침전(寢殿) ③ 동궁(東宮) ④ 중전(中殿)
- 침전 : 국왕과 왕후의 거처, 왕후를 중심으로 의례나 연회의 장소
- 동궁 : 세자의 거주 공간
- 중전은 중궁전과 같은 말로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
2. 삼국의 궁궐
1) 고구려
- 졸본과 국내성을 거쳐 5세기 중반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
- 6세기 후반 인근 지역으로 한 번 더 도성을 옮김
2) 백제 : 위례성-> 웅진시대-> 사비시대 천도
3) 신라 : 경주에 천년가까이 유지하며 왕궁과 여러 이궁을 두었음
- 월성 : 임금이 거주했던 궁궐(대궁, 재성, 본피궁)
- 동궁은 안압지 일대로 추정
박혁거세 | - 금성을 쌓음 - 고려, 조선시대 경주읍성 부근으로 추정 |
5대 파사이사금 | - 월성을 쌓고 이어함 - 현재 경주지 안왕동 지역의 반월성 |
7세기 후반 문무왕 | - 월성을 중수, 안압지와 동궁 새로 건설 |
3. 고려의 궁궐 : 본궐과 이궁들
1) 본궐의 역사와 구조
v 본궐 : 당대 기록에 가장 많이 확인되는 명칭
(1) 역사
- 왕건은 919년 개경으로 천도하여 주산인 송악 아래에 궁궐 건설
- 전란과 반란, 화재 등으로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창
- 원 간섭기 이후 본궐 활용도가 많이 떨어졌고 우왕 대 이후로
중건되지 못함
- 고려 말부터 폐허가 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때 미군이 불도
저로 밀어버려 결정적으로 본궐 터가 망가지게 됨
- 본궐을 여러 시기를 거쳐 증축되어 다양한 축 속에서 복잡한
건물군이 이루어 짐
(1) 구조
- 송악 아래 구릉지에 입지
- 지형에 따라 복잡한 구성을 보임(not 정연한 축과 대칭적인 구조)
- 11세기 현종~12세기 중엽까지 위상과 기능에 충실
- 제 1정전 회경전과 제 2정전 건덕전을 중심으로 두 구역으로 나뉨
회경전 (제1정전) |
- 현종 대 중창되면서 건설된 것으로 보임 - 대규모 불교행사(만 명 이상 승려에게 식사 보시) 와 송나라 사신의 조서를 접대하는 행사를 함 |
건덕전 (제2정전) |
- 태조 대에 처음 건설된 구역 - 요, 금의 사신접대와 백관으로부터 조하를 받는 의식을 행함 |
강안정 | - 연등회의 중심 공간 |
경령전 | - 국왕의 직계 4친의 영정을 모시고 제례를 올림 |
구정 | (승평문~신봉문에 이르는 공간) - 팔관회, 군대사열, 종교행사, 격구 등 |
신봉문 | - 본궐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했던 누각 형식의 문 |
승평문 | - 본궐의 정남문. 3문 형식으로 웅대함 |
내제석원, 내천왕사 |
- 본궐 안에 두었던 절 |
정사색 | - 도교적 행사로 추정되는 초제를 행하였던 건물 |
v 다원적 의례가 행해졌으나 유교 의례가 중심은 아니었음(조선과 대비)
3. 고려 궁궐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3
① 고려 태조 왕건은 개경으로 천도하여 법궁을 건설하였다.
② 송악산 구릉지에 입지했으며, 전각들의 구성이 복잡하였다.
③ 고려 본궐은 한 시기에 동일한 계획하에 지어졌다.
X 여러 시기를 거쳐 증축되어 다양한 축 속에서 복잡한 건물군이
이루어 짐
④ 원 간섭기에 이궁들의 존폐가 빈번하였다.
4. 당대 기록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고려 법궁의 이름은? 4
① 연홍전 ② 대화궁 ③ 연경궁 ④ 본궐
법궁의 이름
- 만월대 : 폐허로 변한 14~15세기에 들어와 붙은 이름으로 고려
법궁의 일반적인 이름
- 연경궁 : 다른 이궁의 이름이 잘 못 전해진 것
2) 고려의 이궁들
(1) 개경 내외, 서경(평양), 남경(서울)에 건설
- 연흥전(숙종대, 남경에 건설)과 대화궁(인종대, 서경에 건설)이 유명
(2) 몽굴 침임기에 강도(강화도)에 궁궐 건설
- 전체적인 구성이나 전각의 명칭은 본궐을 그대로 따름
(3) 원 간섭기에는 원 출신 공주들을 위한 궁궐들이 건설되었고, 당
시 정치구조와 관련된 갈등으로 이궁들의 존폐가 매우 빈번
(4) 연경궁 : 14세기 초 충선왕 대에 중수
- 철훼 되지 않고 규모가 큰 이궁으로서 연회장소로 사용되면서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됨
v 원 간섭기 본궐과 이궁 연경궁
- 본궐 : 즉위식, 큰 규모의 의례장소로 사용 / 연경궁 : 연회장소
- 본궐과 연경궁 사이의 기능 분담 (연경군 위상 é)
- 조선 초 본궐의 이름을 연경궁이라고 착각하게 했던 원인의 하
나로 추정
4. 조선의 궁궐
궁궐 창건 정전 재건 |
경복궁 1395(법궁) 근정전 1865(고종) |
창덕궁 1405(태종) 인정전 1609(광해) |
창경궁 1490(성종) 명정전 1615(광해) |
경희궁 1616(광해) 숭정전 |
경운궁 1593(선조) 중화전 고종 |
1) 조선 전기 :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v 법궁 : 경복궁 / 이궁 – 창덕궁, 창경궁
(1) 경복궁(법궁)
- 1392년 7월 17일 조선 건국, 2년 후 한양 천도, 1395년 9월 완성
- 삼전체제 : 침전-편전-정전
- 경복궁과 전각의 명칭(성리학적 이념)
경복궁 | 나라의 국운이 면면히 이어지는 큰 복을 누릴 것 |
강녕전 | 국왕이 도덕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
보평청 (편전) |
왕과 신하가 경연을 하고 정사를 논하는 곳 -> 국왕의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경연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정치이념과 관련 |
근정전 (정전) |
큰 규모의 정치 의례가 펼쳐지는 곳 -> 임금이 항상 어진 이를 찾고 일을 맡기는 데 부지런 하라 |
v 고려와 조선의 궁궐 차이
고려 | 조선 |
-개경의 주산 송악산 아래 -구릉지에 입지-> 여러 개의 축선 |
-한양의 주산 백악 아래 -주산 아래 평탄한 자리에 입지 -> 단일한 중축선, 엄정한 좌우대칭 |
-이중적 구성(정전-회경전, 건덕정) | -단일 구성(근정전) |
-불교, 도교, 유교 등 다원적 의례 | -유교 의례를 위한 공간 |
- 태종대에 경회루 건설 (태종은 창덕궁에 주로 거주)
- 세종은 경복궁에서 즉위, 거주
- 명종 대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바로 중건, 임진왜란 때까지
권위와 규모 유지
(2) 창덕궁과 창경궁
-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해서 동궐이라 함
- 창덕궁-태종, 창경궁-성종에 의해 창건
- 태종은 세종에게 선위한 후 창덕궁 동쪽 수강궁을 건설
- 성종은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 건설
- 창경궁의 정문은 동향으로 배치
- 구릉지대에 입지함으로써 건물들의 축선이 정연하지 않고 주요
전각들이 횡적으로 연결됨
2) 조선 후기 : 창덕궁, 창경궁의 중건과 신궁 건설
(1)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소실
(2) 1609년 창덕궁 가장 먼저 중건
(3) 광해군이 거처하기를 꺼려 1615년 창경궁 중건
(4) 인경궁과 경덕궁(영조, 경희궁) 새로 건설
-인경궁 : 인왕산 아래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도참에 영향을 받
아 창건
-경덕궁 :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사저, 이곳 역시 왕기가 있다
는 설에 따라 건설
(5) 정묘호란 후 창덕궁과 창경궁 수리에 인경궁 전각 헐어 사용
- 인경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짐
(6) 경덕궁은 영조 대에 경희궁으로 개칭되며 서궐로 불림
- 조선 후기의 주요 이궁의 하나로 활용됨
(7) 동궐과 서궐은 19세기 초반의 화재로 중건공사 시행
- 조선 초기보다 규모 확장
(8) 궐내각사
- 의정부와 육조는 경복궁 앞에 배치(궁궐과 분리)
- 비변사(조선 후기) : 정치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궐 밖 설치
3) 고종 대의 경복궁 중건
(1) 흥선대원군 책임아래 공사 진행
(2) 창건 당시보다 전각의 수 늘고 밀도 증가-왕권강화
(3) 교태전(왕비의 침전) 추가 건설
(4) 건청궁 건설
- 고종과 명성왕후 거처
- 옥호루에서 명성왕후 일본인에 의해 살해
4) 대한제국의 성립과 경운궁
(1) 정릉동 행궁-> 경운궁-> 덕수궁
-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서 돌아와 거처했던 정릉동 행궁
- 광해군 대에 경운궁이라 이름을 붙여줌
(2) 고종 아관파천 이후 서양 공사관으로 둘러싸인 경운궁으로 환궁
(3) 1897년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고치고, 환구단 건설
(4)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그 이튿날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 거행
- 11월까지 미뤘던 명성황후 장례, 국장으로 치름
- 1904년 화재로 2층으로 건설된 중화전을 단층으로 재건
(5) 1907년까지 대한제국의 중심 무대
- 중명전 :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6)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강제 퇴위
(7) 고종에게 ‘덕수’라는 궁호 올려 현재 덕수궁이라 불림
5. 조선의 궁궐들이 지어진 순서대로 연결한 것은? 3
① 창덕궁-경복궁-창경궁-경희궁
② 창경궁-경복궁-경희궁-창덕궁
③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
④ 경복궁-경희궁-창덕궁-창경궁
6. 조선의 궁궐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잘못 설명한 것은? 1
①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복궁은 바로 중건되었다.
②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주요 이궁으로 활용되었다.
③ 의정부는 경복궁 앞에 배치되어 궁궐과 분리되었다.
④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인력과 물자의 문제, 풍수적으로 불길하다는 주장 등으로 창
덕궁이 먼저 재건됨
7. 경복궁에서 큰 규모의 조회 의계가 펼쳐지던 정전의 명칭은? 2
① 사정전(思政殿) ② 근정전(勤政殿)
③ 강녕전(康寧殿) ④ 경회루(慶會樓)
8. 대한제국시기 고종이 거주하며 정치의 중심무대가 되었던 궁궐은? 4
① 경복궁 ② 창경궁 ③ 창덕궁 ④ 경운궁
9. 고려와 조선의 궁궐을 비교한 내용으로 맞지 않는 것은? 3
고려 본궐 | 조선 경복궁 | |
① |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원적 의례가 행해졌다. |
유교 의례를 위한 공간이었다. |
② | 주요 관서가 궁궐 안에 배 치되었다. |
의정부와 육조는 궁궐 밖에 배치되었다. |
③ | 평탄한 자리에 입지하였다. | 구릉지에 입지하였다. |
④ | 두 개의 정전 영역으로 구분 되는 이중적 구성이었다. |
단일한 구성을 취하였다. |
5) 훼손과 복원 :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1) 경희궁
- 1910년 무렵 중심부가 헐리고,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중학교가 전립
-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제가 반공호를 건설하여 회복 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음
(2) 창경궁
- 1907년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자 일제는 창경궁을 동
물원, 식물원, 박물관설치
- 대중의 관람 허가, 창경원이라 불림
(3) 경복궁
-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설물산공진회 개최 명목으로 무수한
전각이 헐림
-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되고 광화문 철거, 이건
- 1933년 공원이 되면서 궁역이 잘려나가고 건물들이 없어짐
(4) 창덕궁의
- 인정전의 회랑을 축소하여 총독부 정책 홍보 전시장으로 만드는 등
원형이 많이 변형 됨
(5) 1960년~1970년대까지도 도로 확장 등의 이유로 궁궐 훼손 계속
(6) 1980년 대 들어 궁궐 보수와 복원 진행
- 창경궁 : 원래 이름 회복과 동물원, 식물원 이전
- 경희궁 : 발굴조사 실시, 주요 건축물의 기단부 확인
- 덕수궁(경운궁) : 2004년 복원사업 시작
- 창덕궁 : 비교적 잘 보존되어 1997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7) 경복궁
-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 2010년 1차 복원정비 사업 완료
- 2010년 8월 광화문 중건 완료, 2차 정비사업과 장기복원계획으
로 나누어 복원공사 현재 진행 중
10. 조선 궁궐의 훼손과 복원에 대해 잘못 설명한 것은? 4
① 광화문은 1926년 조선총독부 건물 완공 때 철거, 이전 되었다.
② 일제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창경원이라고 하였다.
③ 경희궁 터에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과 시립미술관이 건립되었다.
④ 경운궁은 1970년대의 보수를 거쳐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다. X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궁궐은 창덕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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