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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정리

한국사, 한능검, 공무원, 사학, 방통 등 한국문화와 유물유적 요점 정리 15. 도기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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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도기와 자기

도기
자기


1. 도자기의 개념
v 도자기 = 도기(陶器) + 자기(磁器)
- 자기를 가리켜 흔히 도자기로 지칭한다.

도기 자기
낮은 온도 유약을 씌워 높은 온도
  단단하고 물이 표면으로
세어나오지 않음
연질(토기 중심) 과 경질(도기 중심) 청자, 분청사기, 백자, 흑자

v 도기와 자기의 분류 : 유럽방식

도 기 토기
(土器)
-600~800℃, 적갈색
-노천요
(露天窯)에서 생산
-태토를 수비하지 않음
w 수비-태토의 불순물을 걸러내기 위해, 흙을 물
에 넣고 저어 불순물은 가라앉히고 고운 흙만
떠오르도록 하는 것,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정제된 태토를 얻을 수 있음
-선사시대~삼국시대 토기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 토기 일부는 도기 단계에 해당)
도기
(陶器)
-800~1,000℃, 환원 및 산화 번조
-회유
(나뭇재 또는 석회로 만든 잿물) 혹은
연유
(납이 들어 있는 유약)를 씌우기도 함
-통일신라~고려시대 도기
자 기 석기
(器)
-1,100℃, 회색조
-환원 번조, 자연유나 인공유를 씌움
-고려시대 청자와 조선시대 분청사기, 흑자(흑유)
자기
(磁器,
瓷器)
-1,200~1,400℃, 환원 번조
-순도 높은 백토에 유약을 씌운 것
-조선시대 백자

w 번조 : 질그릇•사기그릇•도자기 등을 불에 구워서 만들어 내는 일.
번조는 번조할 때 산소의 양에 따라 산화 번조와 환원 번조 나뉨
화학적 변화가 달라 기물의 유색(釉色)에 큰 영향을 줌
- 산화 번조 : 기물이 엷은 황색을 띠며,
- 환원 번조 : 엷은 청색을 띰
.

 

2. 선사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도기
1) 선사시대의 토기
(1) 신석기 시대 : 빗살무늬토기
- 기원전 5,000년경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토기
(2) 청동기 시대 : 무문
(無文:민무늬)토기
- 기원전 1,000년경 만주와 몽고지방에서 예맥이라는 민족이 빗살무
늬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청동기를 사용하며 제작
- 청동기시대에는 제사나 무덤 치장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특수 용기나 부장 용기도 함께 제작
- 홍도(붉은간토기), 흑도, 채도등은 중국으로부터 영향 받음
(3) 철기시대
- 초보적인 물레 사용으로 대량 생산 가능
- 타날법
(打捺法:도구를 이용하여 그릇의 표면을 두드려서 그릇 벽의 조직을 치
밀하고 두께를 고르는 방법)
과 같은 방법이 응용되면서 대형 용기 제작
- 본격적인 지하굴식 가마의 활용으로 온도 조절을 통해 연질과
경질 토기의 계통 분화 가능

2.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토기는? 1
① 빗살무늬토기 ② 무문토기 ③ 붉은간토기 ④ 타날문토기
【해설】 토기
빗살무니토기-기원전 5,000년경, 신석기시대
무문토기, 붉은간토기(홍도)-기원전 1,000년경 , 청동기 시대
타날문토기-원삼국시대(원 초기의 삼국시대)



2) 삼국시대의 토기
v 각 나라의 문화적, 지역적 특징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기술적 측면
도 획기적으로 진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두귀단지 토제벼루 사람무늬목항아리 바퀴모양토기

(1) 고구려
- 연질계통, 검은색의 경질 계통
- 황갈색 시유
(施釉 : 유약 칠)도기 중심(중국의 영향)
- 입 언저리가 넓고 크며, 다리가 달리거나 밑바닥이 편평
(2) 백제
- 생활용기, 의식용기, 특수용기등 다양한 토기문화
- 녹유
(綠釉 : 초록색 광택)도기와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토기도 존재
- 일본 고훈시대의 스에키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줌
(3) 신라
-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상도 동쪽 지역에 주로 발견
- 문양, 장신구, 뚜껑이 사용됨
- 상형
(像型 : 어떤 물건의 모양을 본뜸)토기류의 제작이 많음
(4) 가야
- 생활용기보다는 제사, 의식, 부장용 토기 제작
- 고배, 기대
(그릇받침), 신발, 수레바퀴, 집, 기마인물 등 특정한
형태로 빚은 이형
(異形 : 이상한 모양)토기가 많음

 

3) 통일신라시대의 도기
(1) 귀족문화 전개와 함께 토기, 금속기, 칠기, 중국의 수입도자기 등 사용
(2) 인화문
(印花文 : 도장문) 장식
(3) 뷸교의 융성으로 화장
(火葬) 유행-> 골호(骨壺) 발달
(4) 부장 용기 중 토우
(土偶)가 많음
(5) 연유도기사용-왕실, 사원 등 고급 수용 층
(6) 통일신라 말에는 회유가 입혀진 도기도 생산
- 고려청차 생산의 밑거름이 됨
(7) 고려 이후 청자가 만들어지며 흙으로 만든 그릇이 도기에서 자기
로 넘어감
1. 다음 중 도기(陶器)에 속하는 것은? 1
① 신라 사람무늬목항아리 ② 고려 청자석류모양주자
③ 고려 백자매병 ④ 조선 분청사기
【해설】 [토기와 도기]는 도기로 분류되며
도기가 제작된 시기는



3. 고려시대의 자기
1) 고려청자
v 청자는 불교, 도교, 귀족, 중국자기와의 교류라는 세 가지 측면
(1) 귀족문화를 대표하는 미술품
(2) 12세기(전성시대) 고려청자의 특징
- 다양한 기종(器種)과 기형(器形)

- 다채로운 문양과 장식 수법
- 비색(翡色)과 상감기법은 고려청자의 독창성을 가장 잘 나타냄
w 상감기법 :금속·도토·목재 따위의 소지 표면에 여러 무늬를 새겨서 그 속
에 같은 모양의 금·은·보석·뼈·자개 따위 다른 재료를 박아 넣는 공예기법
- 기술 수준의 완성단계
- 12세기 중반 이후 중국 도자기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길을 걸음
(3) 고려청자의 색과 형
- 전성기를 맞은 처음에는 청자색과 어울리는 형태의 유려한 선
(線 : 줄)에 최우선의 가치를 둠
- 비색의 청자색은 초록빛과 푸른빛, 투명함이 절묘하게 공존
- 전성기에는 동식물, 인물을 표현한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짐
- 상형청자의 모티브 : 자연적 소재, 종교적 소재(불교)
- 상형청자는 전체 형태를 손으로 빚어 더욱 생동감 있는 묘사 가능
- 청자참외모양병, 청자양각연잎무늬향로, 청자석류모양주자,
청자어룡모양주자
4. 고려청자의 형태상 특징을 맞게 설명한 것은? 3
① 고려청자는 전체 형태를 손으로 빚지 않고 틀로 찍었다.
② 동, 식물과 인물을 표현한 상형청자는 제작하지 않았다.
③ 청자에 나타난 종교적 소재는 불교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룬다.
④ 중국 도자기를 모방하는 형태에 그쳤다.
【해설】 고려청자의 형태상 특징
-전체 형태를 손으로 빚어 더욱 생동감 있는 묘사
-전성기에는 동식물, 인물을 표현한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짐
-12세기 중반 이후 중국 도자기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
자적 길을 걸음



(4) 고려청자의 장식

10~12세기 13~14세기
음각, 양각, 압출양각, 투각 상감기법
음각 무늬를 칼로 새겨 장식
양각 조각양각 : 무늬를 칼로 다듬어 도드라지게 조각
압출양각 : 무늬를 틀로 찍어 냄
투각 그룻 표면에 투공(透孔)을 내어 표현
상감 반 건조된 그릇 표면에 무늬를 음각하고 초벌구이 한 다음, 그
안을 적토나 백토로 메워 유악을 바르고 다시 구워 내는 방식

- 상감 기법이 유행할 때도 실제로는 무문청자가 도자 생산 주를 이룸
- 음각청자 : 은은하고 세련된 느낌, 입체적 효과와 생동감을 더함
- 양각청자 : 압출양각 은 동일한 무늬의 대량생산이 가능했음
- 투각청자 : 입체적, 화려함 -> 일상용기보다 향로, 붓꽂이, 상자,
의자 등에 주로 사용
v 투각청자와 상형청자는 고려청자의 명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 전성기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은 가치의 기준은 색이나 형태보
다 상감무늬로 옮겨 간다.
- 상감청자는 고려청자의 독자적 아름다움으로 자리매김함
- 퇴화청자 : 자토와 백토를 붓에 묻혀 그릇 표면에 그려 넣음
- 철화(철재)청자 : 그릇의 표면에 철 안료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짙은 고동색에서 흑색까지 농담이 있으며, 병, 호, 장구 등에서
일상 용기로 확대
- 화금청자 : 완성된 상감청자의 표면에, 붓에 금을 발라 상감
장식의 윤곽선을 따라가며 선을 그어 화려하게 꾸민 것
5. 고려청자의 장식 기법 중 반 건조된 그릇 표면에 무늬를 음각하
고 초벌구이 한 다음, 그 안을 적토나 백토로 메워 유악을 바르고
다시 구워 내는 방식은? 4
① 음각 ② 양각 ③ 투각 ④ 상감

3. 고려청자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은? 2
① 10세기 중국의 영향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② 고려의 평민문화를 대표하는 예술품이다.
X 귀족
③ 11세기 전남 강진에서 본격적으로 청자를 제작하였다.
④ 12세기에 청자 제작 기술 수준은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2) 고려백자
(1) 고려백자는 처음부터 청자와 함께 제작
- 고려백자 형태와 장식무늬, 번조 방법 등은 청자와 다르지 않
았으나 상대적으로 제작되는 비중은 작음
(2) 고려중기 도자기가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생산되면서, 백자도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에서 지속적으로 생산
(3) 고려백자는 단정한 아름다움을 인정받으며 300년 이상 생산
(4) 고려중기 끝 무렵에 생산이 크게 감소, 결국 중단
6. 고려백자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2
① 고려청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 비중이 적었다.
② 형태와 장식, 번조 방법을 청자와 달리하였다.
X
③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졌다.
④ 고려 중기의 끝 무렵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해설】 고려백자 형태와 장식무늬, 번조 방법 등은 청자와 다르지
않았으나 상대적으로 제작되는 비중은 작았음

 

4. 조선시대의 자기
1) 분청사기
(1) 분장회청사기의 줄임말로 회청사기 위에 백토를 분장했다는 뜻
- 1930년 고유섭이 지은 이름
(2) 상감, 인화, 조화·박지, 철화, 귀얄, 덤벙 기법 사용

상감·인화분청 -15세기 중·후반까지 만들어짐
-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궁중에서 사용
조화·박지 기법 -한 개체의 그릇에 함께 장식되는 경우가 많음
-15세기 중반~16세기까지 전라도 지방에서 주
로 사용
철화분청 -충남 계룡산 입구의 학봉리 가마,
전남 고흥 운대리 가마에서 생산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까지 생산
귀얄분청 -풀비와 같은 붓으로 그릇 표면에 백토를 발라
장식(분청사기의 가장 큰 특징)
-15세기 전반부터 있었으며 16세기 덤벙분청으
로 이어짐
덤벙분청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만든 것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변해가는 마지막 단계인
16세기에 주로 생산

(3) 분청사기는 백자 사용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사라졌지만, 조화·
박지·철화 분청의 자유로운 표현은 분청사기의 진정한 정체성을 이룸
7. 분청사기의 장식 기법 중 백토물에 그릇을 담가 만든 것은? 4
① 조화, 박지 기법 ② 철화분청 ③ 귀얄분청 ④ 덤벙분청


2) 백자
(1) 고려백자의 전통을 이은 연질 백자에서 경질 백자의 새로운 갈래
를 이루어 냄
(2) 조선의 왕실백자
-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생산
- 시대에 따라 유색을 조금씩 달리 했고, 청화, 철화, 동화를 기
본으로 음각, 양각, 투각 등의 장식 기법 사용

- 1,300℃ 이상의 고온 번조를 통한 완전한 자화의 달성 의미
- 성리학 정신 투영
(3) 조선 청화백자와 철화백자
- 백자 표면 장식에 사용된 안료 : 청하(셋 중 으뜸), 철, 동
- 유약층을 기준으로 유약 밑에 그려지거나 칠해져 유하회 또는
유하채라고 부름
(유상채, 유상회로 장식한 예는 알려지지 않음)
- 붓을 사용하여 장식하기 때문에 소재의 선택이나 표현이 다양
하고 다채로움
- 왕실 도화서 소속의 화원들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 15세기경
(중국에 이어 매우 이른 시기) 처음 만들어졌으며 명대 양
식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선 특유의 면모를 갖춤
- 19세기 후반까지 왕실 주도의 관요체제를 통해 왕실의 수준과
취향을 일관되게 토영
- 중국, 일본과 달리 무역품이었던 적이 없고 순수하게 왕실과
사대부, 문인지식층과 부유층들의 향유물
v 중국 청화백자
- 중국 원대에 처음 만들어졌고 명대에 유럽에 수출
- 18세기 유럽 경질백자 탄생의 직접적 원인이 됨
(4) 철화백자
- 전통 안료 석간주
(石間朱 :석간주 산화철을 많이 포함한 붉은빛 흙
에서 산출한 검붉은 안료)
- 소재와 구성이 청화백자와 유사했으나 가치에 있어서는 차이 남
-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었지만 특히 1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광주
관요, 지방까지 폭넓게 사용
(원료를 구하기 쉽고 다루기도 쉽기 때문)
- 임진왜란 이후 청화백자 대체품으로 많이 만들어짐
(5) 동화백자
- 동화는 산화동, 탄산동이 주성분인 안료로 그린 것
- 조선시대 도화백자는 17세기에 등장했고, 19세기에 청화, 철
화, 동화가 한 그릇에 함께 장식되기도 함
(6) 조선의 백자와 예
- 왕실 법식과 기물의 범례에서 청화백자 용준
(龍樽 : 용 무늬 항아리)
은 왕실의 예를 대표
- 17세기 후반 이후 청화백자 새롭게 발전하면서 높이 50cm가
넘는 당당한 몸체의 청화백자 용준이 만들어짐
- 청화백자로 만든 묘지
(墓誌 : 죽은 사람의 이름·신분·행적·자손의 이
름 등을 기록한 글)
, 청화백자 제기, 명기 등을 통해 조선에서
예가 성립되었던 중심에 백자가 있었음을 보여줌
(7) 청화백자에 그려진 그림과 시
-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청화백자에도 문인풍의 시와 그림(사군자,
초화, 산수화)이 그려져 문인들의 정신세계를 드러냄. 인물화도
동물화도 그림
- 조선 후기 지식층 사이에서 유행했던 서화 골동과 분재 취미가 청
화백자 문양으로도 나타남, 청화·철화·동화의 장식도 점차 더해짐
- 청화·철화·동화 기법을 섞어 장식하거나, 청재, 철재, 동채 등 안료
를 그릇 전체에 씌우는 경향이 나타남-> 다양한 연적에 나타남
(8) 다양한 장식백자
- 19세기 청화백자 사용 계층 확대
- 외형상 푸른색을 많이 띠었으며, 종류와 수량이 증가하고 문양이 다양해짐
- 이 시기에 청대 자기의 영향이 더해졌고 청대 자기를 많이 수입
- 광주 분원의 백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새로
운 형태의 그릇과 생활용기가 청화백자로 제작되는 등 생활 깊
숙이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문화 자리 잡음
- 문양에서는 사군자, 산수 등 문인 취향 소재에서 기복사상 등
장수하고 복을 받고 싶은 마음을 직접 표현한 소재 등장
-> 당시 유행했던 민화와 일맥상통
- 조선 후기 왕실행사에서 사용된 청화백자들은 조선 장식백자가 왕
실의 미의식을 중심으로 일관된 품격과 수준을 이어왔음 보여줌

8. 조선백자에 대해 잘못 설명한 것은? 3
① 기술적으로 완전한 자화(磁化)의 달성을 의미한다.
② 신진사대부의 성리학 사상을 투영하였다.
③ 백자를 장식할 때 유약 표면에 갖가지 색칠을 하였다.
X
④ 백자 표면 장식에 사용된 안료의 으뜸은 청화였다.
【해설】 유약층을 기준으로 유약 밑에 그려지거나 칠해져 유하회
또는 유하채라고 부름
9. 조선 청화백자의 특징으로 맞지 않는 것은? 4
①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왕실의 미의식을 나타냈다.
② 18세기에는 청화백자에 문인풍의 그림을 그려졌다.
③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취미생활이 문양에 반영되었다.
④ 청화백자로 된 생활용기는 제작되지 않았다.
【해설】 광주 분원의 백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새로운 형태의 그릇과 생활용기가 청화백자로 제작되는 등 생활
깊숙이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문화 자리 잡음
10. 조선왕실 잔치 때 꽃이나 술을 담았던 청화백자 용무늬항아리는? 1
① 용준(龍樽) ② 제기(祭器) ③ 명기(明器) ④ 연적(硯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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