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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도사, 사주, 철학과, 동양철학, 방통대 교양 등 동양철학 요점 정리 11. 왕양명의 철학2: 앎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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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왕양명의 철학2: 앎과 실천

 

* 󰡔전습록(傳習錄)󰡕: 왕양명의 어록과 서간집. 왕양명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자료. ‘전습(傳習)’󰡔논어󰡕에 기록된 증자(曾子)의 말에서 유래.

증자가 말했다. 나는 매일 나 자신에 대해 세 가지를 반성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서 정성을 다했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켰는가? 전수받은 것을 잘 익혔는가?(曾子曰: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논어󰡕「학이

 

 

1. 심즉리론(心卽理論)

-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이()이다.’ 마음은 의 근원으로서, 사사로운 욕구의 개입 없이 타고난 그대로 순수하게 작용하면, 그것이 곧 로 드러난다는 주장. 왕양명의 주된 관심은 ()’, ‘()’, ‘()’, ‘()’ 같은 윤리적 원리로서의 에 있음. 구체적 상황에 따른 윤리적 실천 방안들이 아무리 외적인 강구를 필요로 하더라도, 그 기초는 윤리적 주체의 마음에 있음.

마음이 곧 이()이다. 이 세상에서 마음 밖에 또 일이 있겠으며 마음 밖에 또 이()가 있겠는가? []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면서,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하겠는가? 임금을 섬기면서, 임금에게서 충()의 이()를 구하겠는가? 친구와 교제하거나 백성을 다스리면서, 친구와 백성들에게서 신()과 인()의 이()를 구하겠는가? 이 모든 것은 단지 이 마음에 있을 뿐이다. 마음이 곧 이()이다. 이 마음이 사사로운 욕구[私欲]에 의해 가려지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천리(天理)이니, 밖에서 조금이라도 보탤 필요가 없다.(心卽埋也. 天下又有心外之事心外之理乎. [] 且如事父不成去父上求箇孝的理. 事君不成去君上求箇忠的理交友治民不成去友上民上求箇信與仁的理. 都只在此心. 心卽理也. 此心無私欲之蔽, 卽是天理. 不頂外面添一分.)—󰡔전습록󰡕()

서애가 말했다. []부모 섬기는 일은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일, 저녁에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에 일찍 문안을 드리는 일 등 수많은 세부적 조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따로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요?선생님(왕양명)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강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거기에도 핵심이 있다. 오직 이 마음에서 사사로운 욕구를 없애고 이()를 보존하는 일로부터 강구해 나가야 한다.[]이 마음이 사사로운 욕구 없이 순수하게 이()여서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마음이 진실되다면, 겨울에는 자연히 부모가 추울까 염려하여 따뜻하게 해 드리는 방법을 찾게 되고, 여름에는 자연히 부모가 더울까 염려하여 시원하게 해 드리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愛曰:[]如事父一事, 其間溫凊定省之類, 有許叫多節目. 不知亦須講求否.先生曰:如何不講求. 只是有箇頭腦. 只是就此心去人欲存天理上講求.[]此心若無人欲, 純是天理, 是箇誠於孝親的心, 冬時自然思量父母的寒, 便自要求箇溫的道理. 夏時自然思量父母的熱, 便自要求箇淸的道理.)—󰡔전습록󰡕

- ‘성즉리심즉리’: ‘성즉리(性卽理)’, 본성이 곧 이()이다는 나 이전에 우주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원리로서의 ()’가 내 마음에 본성으로 주어져 있다는 의미. 심즉리는 마음이 의 근원이며, ‘는 마음이 본래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 움직였을 때 드러나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결이라는 의미.

()란 마음의 움직임이 드러내는 원리이다. 그것이 부모에게 발현되면 효가 되고, 임금에게 발현되면 충()이 되며, 친구에게 발현되면 신()이 된다. 끊임없이 변화해서 일일이 다 궁구할 수 없는 사태들도 결국은 나의 한 마음에서 발현되지 않은 것이 없다.(理也者, 心之條理也. 發之於親則爲孝, 發之於君則爲忠, 發之於朋友則爲信. 千變萬化, 至不可窮竭, 而莫非發於吾之一心.)—󰡔왕양명전집󰡕8, 서제양백권(書諸陽伯卷)

- ‘마음 밖에 이()가 없고 마음 밖에 물()이 없다’: 마음이 일으키는 다양한 종류의 의식 활동이 ()’, ‘가 향해 있는 대상이 ()’. 마음과 외적 대상은 를 매개로 하여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음. 왕양명은 격물(格物)’에서 ()’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풀이. ()을 바로잡는 것은 곧 그 물()을 향해 있는 마음의 의()를 바로잡는 것. 왕양명에게 격물은 이()에 대한 외적 탐구가 아니라 마음의 공부.

마음이 발한 것이 의()이며,[]()가 있는 곳이 바로 물()이다. 예를 들어 의()가 부모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 섬기는 일도 하나의 물()이다. ()가 임금 모시는 데 있다면, 임금을 모시는 일도 하나의 물()이다. ()가 백성들에게 인()을 행하고 사물들을 아끼는 데 있다면, 백성에게 인()을 행하고 사물을 아끼는 일도 하나의 물()이다. ()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다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도 하나의 물()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 밖에 이()가 없고, 마음 밖에는 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心之所發便是意. 意之本體便是知. 意之所在便是物. 如意在於事親, 卽事親便是一物. 意在於事君, 卽事君便是一物. 意在於仁民愛物, 卽仁民愛物便是一物. 意在於視聽言動, 卽視聽言動便是一物. 所以某說無心外之理, 無心外之物.)—󰡔전습록󰡕

격물(格物)이란 󰡔맹자󰡕에 나온 대인(大人)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다[大人格君心]는 문장의 바로잡다[]는 말과 뜻이 같다. 그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없앰으로써 마음의 올바른 본래 모습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념(意念)이 있는 곳에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없애고 그 올바름을 온전하게 해야 한다.—󰡔전습록󰡕

 

2.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

- 주희의 지행론(知行論): 경중을 논하면, ()이 더 중요. 선후를 논하면 지()가 앞서고 행()은 뒤에 온다는 입장. ‘지선행후설(知先行後說)’이라 칭함. 앞서는 지()가 참될수록, 즉 진지(眞知)일수록 뒤에 오는 행() 역시 올바를 수 있음. 그러나 행동이 기존의 앎을 심화시키거나 새로운 앎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음. ()와 행()은 상호 계발하면서 나란히 진전되는 관계에 있다는 것. ‘지행호발설(知行互發說)’ 또는 지행호발병진설(知行互發竝進說)’이라 칭함.

선후를 논하자면, 앎이 먼저이다. 경중을 논하자면, 행동이 중요하다.(論先後, 知爲先. 論輕重, 行爲重.)—󰡔주자어류(朱子語類)󰡕 5

앎과 행동은 모름지기 병행해서 공부해야 한다. 아는 게 분명할수록 행동은 더욱 도탑게 된다. 행동이 도타울수록 아는 것도 더욱 분명해진다. 어느 하나에 편중돼서 다른 하나를 폐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양쪽 발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면, 점차 다닐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한쪽이 약해서 다른 한쪽만 내딛는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먼저 알아야만 비로소 행할 수 있다.(知與行, 工夫須著並到. 失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주자어류󰡕 14, 169

- 왕양명의 지행합일론’: 왕양명은 주희의 지행론은 앎과 행동을 서로 다른 별개의 활동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함. 앎과 행동의 본모습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활동이고, 둘의 분리와 불일치는 그 본모습이 은폐되고 왜곡된 결과임. “앎은 행동의 시작이고, 행동은 앎의 완성(知是行之始. 行是知之成)”(󰡔전습록󰡕)으로, ()와 행()은 한 가지 활동의 두 측면.

서애가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형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효도하지 공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앎[]과 행위[]는 분명히 두 가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선생님(왕양명)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미 사사로운 욕구[私欲]에 가로막혀 단절된 것이지, 앎과 행위의 본모습은 아니다. 알면서도 행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도 행위하지 않는다면, 이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단지 효와 공경에 대해서 말할 줄 안다고 해서 그가 효와 공경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아픔을 안다는 것도 반드시 스스로 아픔을 겪어봐야 비로소 아픔을 아는 것이다. 추위를 안다는 것도 반드시 스스로 추위를 겪어봐야 한다. 굶주림을 안다는 것도 반드시 스스로 굶주려봐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앎과 행위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이겠는가?(愛曰, 如今人儘有知得父當孝, 兄當弟者, 卻不能孝, 不能弟. 便是知與行分明是兩件. 先生曰, 此已被私欲隔斷, 不是知行的本體了. 未有而不行者. 知而不行, 只是未知. 聖賢敎人知行, 正是要復那本體.[]不成只是曉得說些孝弟的話, 便可稱爲知孝弟. 又如知痛, 必已自痛了, 方知痛. 知寒, 必已自寒了. 知饑, 必已饑了. 知行如何分得開?)—󰡔전습록󰡕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앎과 행위를 둘로 나누려고만 한다. 그래서 한 가지 선하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아직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지행합일을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행위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 조금이라도 선하지 않음이 있다면, 그 선하지 않은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 철저하게 그 선하지 않은 생각이 가슴속에 남아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 주장의 근본적인 취지이다.(今人學問, 只因知行分作兩件, 故有一念猣動, 雖是不善, 然卻未曾行, 便不去禁止. 我今說箇知行合一, 正要人曉得一念發動虛, 便卽是行了猣動虛有不善, 就將這不善的念克倒了, 須要徹根徹底不使那一念不善潛伏在胸中此是我立言宗旨.)”—󰡔전습록󰡕()

 

3. 치양지론(致良知論)

- ‘치양지(致良知)’: ‘양지(良知)를 실현하다.’ 왕양명은 격물치지(格物致知)’치지(致知)’치양지로 풀이함. ‘양지는 타고난 도덕적 지각능력을 가리킴. 양지의 진성측달(眞誠惻怛)’, 즉 타자의 고통에 대해 연민과 슬픔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이며,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서 자신의 의()의 작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자각적인 반성 능력이기도 함. 양지가 허령명각(虛靈明覺)’, 즉 밝게 깨어 있으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지각하고 그것에 대해 감응을 일으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과 운동의 힘인 ()’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 양지의 작용이 드러내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결이 곧 ()’.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은 양능(良能)이고, 헤아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능력은 양지(良知)이다. 어린아이도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알고, 성장해서는 자기 형을 공경할 줄 안다.(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者,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맹자󰡕「진심(盡心)()

양지(良知)는 이()의 자연적인 밝은 각성이 발현되는 곳이다. [고통에 빠진 자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것[‘진성측달(眞誠惻怛)’]이 바로 양지의 본모습이다. 그러므로 이 양지의 진성측달을 실현하여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이고, 이 양지의 진성측달을 실현하여 형을 따르는 것이 바로 공경이다. 이 양지의 진성측달을 실현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이 바로 충()이다. 이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양지일 뿐이고 하나의 진성측달일 뿐이다.(良知只是一箇天理自然明覺發見處, 只是一箇眞誠惻怛, 便是他本體. 故致此良知之眞誠惻怛以事親便是孝, 致此良知之眞誠惻怛以從兄便是弟, 致此良知之眞誠惻怛以事君便是忠, 只是一箇良知, 一箇眞誠惻怛.)—󰡔전습록󰡕()

양지(良知)라는 것은 맹자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은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은 생각을 기다리지 않고도 알고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이니, 그런 까닭에 그것을 일컬어 양지(良知)라고 한다.[]무릇 의념(意念)이 발하면 내 마음의 양지는 저절로 알지 못함이 없다. 의념이 선하면 내 마음의 양지는 저절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의념이 선하지 않으면 내 마음의 양지는 그것을 저절로 알아차린다. 이 모든 것에 타인이 관여한 바는 없다.(良知者, 孟子所謂是非之心, 人皆有之者也. 是非之心, 不待慮而知, 不待學而能, 是故謂之良知. 是乃天命之性, 吾心之本體, 自然靈昭明覺者也. 凡意念之發, 吾心之良知無有不自知者. 其善歟, 惟吾心之良知自知之其不善歟, 亦惟吾心之良知自知之是皆無所與於他人者也.)—「대학문(大學問)

허령명각, 즉 밝게 깨어 있어 자유롭고 신비롭게 지각하는 마음의 작용이 바로 이른바 양지의 타고난 모습이다. 그 허령명각의 양지가 세상 일에 감응하면서 움직인 것을 의()라고 한다.(心之虛靈明覺, 卽所謂本然之良知也. 其虛靈明覺之良知應感而動者, 謂之意.)—󰡔전습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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